고려사절요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원년(1010) 11월에 이르기를
신묘일에 거란 군주가 스스로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호명하며 압록강을 건너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순검사巡檢使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양규楊規가 진사鎭使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 부사副使인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인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이 흥화진은 둔전이 기반인 최전방 기지라, 제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성종이 친정하고, 소배압이 총사령관을 맡은 가운데 고려 경내로 들어와 첫번째로 들이친 곳이다.
한데 이곳을 방비하는 고려군 수뇌진이 죽 나열되었거니와, 이 흥화진은 행정구역이면서 군단인 까닭에 이곳에는 본래 그 우두머리가 있어 이를 진사鎭使라 했으니, 使란 앞서에서도 말했듯이 중앙정부에서 직파한 공무원을 말한다.
따라서 이 전쟁 당시 흥화진 지방장관인 흥화진사興化鎭使는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이었고, 그 아래 부상령관이자 부장관이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였다. 판관判官은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였으니,
이 판관이라는 자리는 두 가지 기능이 있으니, 첫째 문관이라 행정관 역할을 했고 둘째 무관인 군사령관 감시였다.
군사령관은 군대를 보유한 까닭에 언제나 감시대상이었으니,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판관이 했다.
이 흥화진에 양규가 들어가 방비한 것이다. 이 당시 양규는 형부낭중刑部郞中이면서 순검사巡檢使였다.
이런 진용을 보면서 일어난 의문!
흥화진 최고 사령관이자 지방장관은 엄연히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이었는데, 그렇다면 양규랑 관계는 어찌되는가? 누가 총사령관인가? 더구나 두 사람은 직급이 같다! 한 사람(양규)은 형부낭중이요, 다른 사람(정성)은 호부낭중이었다.
둘은 소속이 달랐다. 이 다른 소속 같은 직급끼리 인화가 되었겠는가? 이 점을 어찌 해명해야 하는가?
다만 이때 양규는 순검사巡檢使였는데, 이 기능이 대체 뭔가? 글자 그대로는 관할 지역을 돌아다니며 단속하는 일을 하는 중앙관이라는 뜻이었는데, 이 순검사가 관할하는 지역은 어디였는가?
나아가 저 직제를 보면 조선시대랑 비교해 특이한 점이 있으니, 현지 지방관들이 모조리 소속은 중앙관부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저들은 중앙 정부부처, 저들의 경우 형부와 호부 소속이었다.
판관判官 장호張顥 또한 늠희령廩犧令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친구는 제사를 관장하는 예부 소속이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저들은 왜 지방관이면서도 소속은 중앙정부 부처인가?
저렇다면 저들은 평소 근무지는 현지인가 중앙정부부처인가? 월급은 어디서 타갔는가? 현지서 탔는가? 아니면 개경에서 탔는가? 의문이 한둘이 아니다.
이 겸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재정 때문이었다고 본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일타쌍피를 했다고 본다.
또 하나 흥화진은 훗날 현종 21년(1030) 영주靈州로 한 직급 높아져 방어사防禦使가 주 장관으로 설치되는데, 그렇다면 영주 승격 이전 흥화진은 어디 소속이었다는 말인가? 상급 주州가 따로 있었을까 아닐까?
진鎭과 주州는 직속 상하관계인가? 아니면 직급은 다르지만 별도로 움직였는가? 다른 지역 주 장관도 다 명칭이 방어사였는가 아니면 변경이라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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