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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3차 고려 막부정권] (2) 영업전이 당긴 반란의 씨앗

by taeshik.kim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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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쌓여가는 무신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캡처

 
고려사를 통괄할 때 건국기를 막부정권 1기라 명명한다면,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시기를 2차 막부정권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대략 백년 시간이 흘러 정중부에 의한 우리가 아는 그 막부정권이 본격 개막한다. 

종래 막부정권이라 하면 정중부 이래 최씨 집권기에 전성을 이루는 시기만을 특정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생각보다 더 다채롭고 생각보다 더 복잡했으며 생각보다 더 많았다. 

당장 강조 정권이 막을 올린 고려 현종시대만 해도 강조 말고도 또 한 차례 막부정권이 있었으니, 이 자리에서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 한다. 

이를 그 주모자 이름을 따서 김훈·최질 막부정권이라 해야 할 성 싶은데, 때는 현종 5년(1014) 11월. 작금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막 이 시기로 돌입하는 듯하거니와, 바로 그 무대가 되는 사건이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5년 11월 조에 일컫기를 

계미 초하루에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유배 보냈다.

고 하거니와,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바로 상론한다. 

경술(1010)의 병란이 일어난 이후 군사들 정원을 늘리자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졌는데, 황보유의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거두어 녹봉에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이 자못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최질은 더욱이 변경에서의 공적으로 누차 무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문관직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상 불만스러운 상태였다.

이에서 말하는 경술의 병란이란 바로 제2차 고려거란전쟁을 말하며 이때 현종은 나주까지 파천하고, 개경 궁성은 불타버렸다. 
 

열받은 무신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캡처



이번 쿠데타는 바로 이 전쟁에서 비롯한 것으로 고려사 찬자들은 진단한다. 나는 역사를 볼 때 항용 돈이라는 관점을 유지할 것을 주문했는데, 이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결국 돈 문제였다. 

쿠데타 주동 세력은 왕과 왕궁을 호위하는 대통령경비실 소속 부대장들이었다. 이것이 심각했다. 왕을 호위해야 할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까닭이다. 이는 변방 부대를 이끌고 들어와 권력을 잡은 강조와는 다른 점이었다. 

전쟁은 당연히 엄청난 물자를 요구한다. 군사들은 늘렸지 그에 따라 비용은 엄청나게 들어가지, 쪼들린 빚더미는 결국 다른 데서 메꾸어야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주목한 것이 하필 군인들이 먹고 사는 터전인 영업전이었다.

이 영업전은 군인들이 살아가는 절대의 기반이었는데, 이걸 쪼개서 그에서 나는 소출 혹은 이득 중 일부를 다른 백관, 간단히 말해 문관들 연봉으로 충당했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려사에서는 논급이 없지만 군대 요직도 문관이 다 차지하는 마당에 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당장 저 시대만 해도 직전 서희가 직접 사령관이 되어 이른바 강동육주를 개척했는가 하면, 직후 전개된 제3차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총사령관 강감찬, 부사령관 강민첨은 모조리 문관이었다.

훗날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도 문관 김부식이었으니 이런 일련의 사태에 왜 무관들 불만이 없었겠는가? 팽배팼다. 

이는 이 쿠데타 사후 전개 양상을 보면, 진짜 무관들 불만이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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