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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고려에 대해 순절한 씨족은 얼마나 있었을까

by 신동훈 識 202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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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집안 족보들 보면 

여말선초에 무너져 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충성을 안 바쳤다는 씨족이 드물다. 

예를 들어 영조 때 딱 두 사람 이름만 전해졌다는 두문동 같은 경우 

그 이후 확대생산되어 공문 72 제자처럼

두문동 72명 이름이 다 만들어진 것도 모자라 

72명 안에는 안들어 갔지만 우리 조상도 두문동에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까지 겹쳐 

두문동 이야기는 조선후기 책으로도 여럿 나올 지경이 되었다. 

고려말에 멸족한 씨족이라는 것이 물론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 짐작이다. 

필자 집안 족보도 상고하면 고려시대 내내 단계로 내려오다가 

(이것도 할 말이 많은 부분인데 단계로만 내려올 리 있겠는가? 다 망실되고 딱 한 집안만 살아남았다고 본다)

몽골간섭기 시대에 소위 말하는 신진사대부로 집안이 흥하는 것을 보는데 

이때 집안 장손이 우왕의 장인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족보 뿐 아니라 고려사에도 나와있으니 맞을 것이다). 

필자의 직계도 이 당시 부인 되는 분이 개성왕씨로 올라 있는데 

우왕 창왕 당시 왕실과 집안 전체가 어느 정도 결합이 있었음도 상고해 볼 수 있겠는데

이 때문에 족보에 보면 고려왕실이 망하면서 태조에게 저항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부분은 역사서에서 상고가 가능한 부분인데 

우왕의 장인이었다는 분은 결국 실세하여 신왕조 개창과 함께 유배되었지만 

그 후손은 조선시대 내내 여전히 문중의 번성한 한 지파를 남기도록 허용되었던 것 같고 

그 외에 다른 분들은 모두 조선왕조에 출사하여 

필자의 직계 조상되는 분은 족보에는 이 태조에게 옥쇄를 주지 않고 버티다가 이를 집어 던져 

옥쇄 한 쪽이 깨어졌던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왕조실록을 보면 멀쩡이 출사하여 세종대에 세상을 뜨고

이 때문에 세종이 조회를 사흘간 파한 것으로 나온다. 

말하자면 족보와 역사서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 경우 당연히 역사서 기록이 옳을 것이다. 

필자는 사실 이전만 해도 족보의 역사적 가치는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사서가 전하지 않는 무언가 누락된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족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이 때 이후로 하게 되었다. 

족보에 적힌 이야기도 이 모양일진대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 등은 누가 지어냈는지도 모르는 이야기일 판이라, 

족보라는 것은 조상을 공유한다고 믿는 일족의 희망사항이 많이 반영된 판타지라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되었다. 

각설하고-. 

몽골간섭기와 공민왕, 우왕, 창왕 때에 번성하던 집안이

조선의 개창과 함께 소멸하거나 퇴락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족보를 보면 집집마다 절개를 지키지 않은 조상이 없는데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신왕조가 개창되었겠는가.

신왕조는 의도적으로 이전 왕조의 씨족들을 배척하기 보다는 

되도록 포용하려 했던 것 같고, 

조선 후기의 고려왕조에 대한 순절이라던가, 

두문동 현인들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절개를 지킨 선조를 갖고 싶어하는 각 씨족들의 욕망이 반영되었을 결과라 본다.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라 하지만 여말선초에 독야청청했던 사람.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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