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고려 묘지명 최고 인기 작가는 누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2. 9.
반응형

고려 후기 묘지명은 한 30%가 목은 이색(1328-1396)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은의 글이 많다.

물론 그가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받아 망자의 가는 길을 보다 영광스럽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이색이 정치가이자 관료이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그에게 서로 다른 가문의 행장들을 봐가면서 이렇게 많은 산문을 쓸 시간은 있었던가 의문스럽다.

정습명 묘지명



혹 아들이나 제자에게 대필을 시키지는 않았을지, 틀을 갖춰놓고 그에 맞춰서 필요한 표현이나 사건들을 끼워맞춘 것은 아닐지 궁금해지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라도 과연 있을까.


*** 편집자注 ***


글, 특히 비문 잘 쓴다 소문나는 일이 달갑지만은 않아 거꾸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첫째 거짓말을 해야 한다. 묘지명이라는 특성상 칭찬일색일 수밖에 없다.

둘째 생각보다 그 보답이 크지 않다. 술 한 잔 받아먹는 일로 땡이었다. 이른바 재능기부.

셋째 청탁원고라 쓰기가 몹시도 싫다.

이런 고통을 적나라히 폭로한 이가 중국에서는 채옹이오 한국에선 최치원이다. 후자는 남의 비문이나 쓰는 자기 신세를 처량히 한탄 토로한다.

하지만 이는 마약과도 같아 결코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

첫째 그 청탁자가 왕실을 비롯한 권력가들이며

둘째 글 잘쓴다는 명성은 유명세를 안겼고

셋째 그걸로 그 자신도 권력 반열에 오르거나 유지했기 때문이다.

남의 비문에다 자기 울분을 토로한 최치원

남의 비문에다 자기 울분을 토로한 최치원

"을사년(신라 헌강왕 11, 885)에 이르러, 나라 백성 중에 유도儒道를 중매쟁이로 삼아 황제 나라로 시집가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주하사柱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이름을 최치원崔致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