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통신>
제주시에서 성산 쪽으로 가려면 흔히 시원하게 뚫린 번영로를 타게 된다. 그 길을 타고 쭉 가다보면 나오는 동네가 봉개동이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노라면 '明道岩마을'이란 빗돌을 만나고, 다시 거기서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어 약간 올라가면 제법 넓은 터전 위에 높직한 축대, 그 위에 비석 하나가 얹힌 광경을 만난다.
사실 이 터는 안세미오름이란 오름의 분화구다. 제주가 한창 들끓던 시절 여기서도 화산폭발이 있었던 건데, 그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이 모여살게 된 것이다.
왜 여기 이렇게 높직한 축대를 쌓았느냐하면, 옛날 여기 살았던 한 선비를 기리려함이다. 그 선비는 김진용金晉鎔이다.
조선 중기를 산 그는 진사시에 급제해 상경한 뒤 참봉 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사양하고 낙향한 뒤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지금 오현단 자리에 장수당藏修堂이란 집을 지어 유생을 기르자는 제안을 제주목사에게 올려 관철시킬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뒤, 제주 유림들은 그를 향현사鄕賢祠에 모시고 제를 지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이후 향현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60년대 들어, 김진용이 은거하며 살았던 이곳 명도암마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그를 기리게 된 것이다.
높직이 올린 축대(김진용 선생 생전에는 없었을)를 올라 비석을 본다.
비신만 2m는 족히 되지 싶은데 기단이 하도 높아서인지 오히려 왜소해보인다. 비문은 국한문혼용체인데 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김충현이 즐겨 쓴 예서와 고체古體인데, 40대 글씨라 그런지 원숙한 느낌은 아니다. 실험작에 가깝다 해야할까. 눈으로 비문을 쓸어 채우니 탁본처럼 글자가 선명해진다.
때는 겨울이라 눈보라가 휘몰아치니 이야말로 세한시절인데, 서울의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았던 향현鄕賢의 자취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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