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전자료 데이터베이스(DB)화 사업의 첫걸음은, 당시 서울시스템이라는 업체의 조선왕조실록 시디롬 출시라고 볼 수 있다.
매우 비싸다는게 흠이었지만, 이게 나온 뒤로, 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에서 순식간에,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디롬 이전과 이후는 한국 인문학 연구 수준이 달라졌다.
두 번째 도약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고전번역원, 이 4개 기관이 연합하여 수행한 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구축 사업이다.
먼 미래에 한국의 고전자료 정보화의 역사를 누군가가 정리한다면, 이 '역사정보 통합 시스템 구축 사업'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이 사업은 지금도 각 기관별로 사업명칭은 바뀌었지만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나오고부터는 그냥 '획기적 변화'정도가 아니라, 경천동지, 하늘과 땅이 놀라서 덜덜 떨릴 정도라 해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학계의 연구환경이 달라졌다.
내가 우리회사에 입사해서 신명나게 내 재능과 땀과 돈을 써서 일을 한 적이 세 번 있었는데 그중 가장 신명났던 일이 저 역사정보통합시스템구축사업이었다.
초기에는 가난했던 회사가 기름값도 주지 않았는데, 구기동에 있던 회사에서 서울대 규장각,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과천 국사편찬위원회까지 매주 수시로 그 수많은 회의에 내돈으로 기름 사넣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때 들어간 기름값이라든지 종로2가 컴퓨터학원비라든지 대학원생들 스터디 지도 포기 손실비용 등등을 합치면 당시 시세로도 몇백이었을지 알 수가 없다. 일에 미쳐 있었다.
한문번역을 한다는 문과생이 컴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는데, 무슨 저따위 등신같은 질문을 하나? 하는 눈으로 수강생들이 쳐다보곤 했다.
그게 기초적인 코딩 공부였는데 그때는 코딩이라는 말을 안 썼다.
아, 옆길로 샜다. 각설하고. 1단계 도약이, 검색 가능한 시디롬이 나왔다는 거. 인덱스, 색인을 통해서 책 페이지를 뒤적거리며 찾던 시대에서 컴퓨터로 검색하는 시대로 넘어가는거. 다음 2단계 엄청난 도약은 역사정보통합시스템이라는거. 이건 별도의 개인별 저장장치가 불필요한거.
그리고 지금은 이 2단계가 연속되면서 여러 기관이 자료 축적이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거. 자, 그런데 이제는 제3단계 도약을 해야할 시기이다.
각 기관은 모든 자료를 있는그대로 정리해서 이미지와 텍스트로 서비스해야 한다. 이 3단계 도약에서는 번역사업도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번역 개념은 번역자 개인이 자료의 일정 분량을 개인별로 번역해서 통합하는 구조다. 이제는 통째로 펼쳐놓고 통째로 번역하는게 효율적이다.
설명하자면, 세종실록 10000페이지를 5명이 번역한다고 가정하자. 현재의 방식은, 분량을 5등분하여 1인이 2천 페이지씩 번역한다.
이렇게 하지 말고, 5명이 수시로 회의하면서 1만페이지 전체에서 합의된 구절부터 번역한다. 많은 유사 문구는 일일이 사람이 번역할 필요가없이 AI가 다 해준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려나가면 나중에는 고난도 몇 구절만 남는다. 이걸 계속 연구하고 토론해 정답을 찾아나간다.
번역자는 각자가 수준이 다르고 아는 분야가 다르니 각자 자기 장점을 살려서 번역문을 메꾸어나가면 된다.
앞으로 몇년 안에 이걸 주도할 사업가? 연구자? 가 나올 수 있을까?
***
한국고전번역원 박헌순 선생 글인데 최일선에서 저 사업을 맡아 추진한 사람 증언이며, 아울러 저 과정을 내가 다 지켜보았으므로 그 지난한 고충과 그 엄청난 성과를 생생히 기억한다.
어디 하나 거짓과장으로 꾸미거나 삭제한 곳 없다.
저 흐름과 때를 같이해서 중국과 대만에서 24사를 중심으로 고전적 서비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대만에서는 중앙연구원이 24사 원문서비스를 개시했고 중국 본토에서는 그 시디롬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후 이 서비스는 대장경과 도장, 그리고 여타 모든 고전적자료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혁명이 내 당대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나는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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