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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공주 송산리고분군, 그 현황과 개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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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주 송산리고분군 제29호분을 재발굴하고는 그 성과를 공개했으니, 송산리고분군에는 땅속에 매몰된 상태에 있던 29호분을 제외하고는 현재 7기가 외부로 노출된 상태다.  

이를 일련번호를 붙여 구분하곤 하는데, 그 번호 양상이 아래 첨부하는 도판과 같다. 

 

 

보다시피 송산리고분군은 그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개 군집으로 나눌 만하다. 무령왕릉을 꼭지점으로 그 전면에 5호분과 6호분이 위치하는 뭉치가 하나요, 나란히 1렬을 이룬 1~4호분이 또 다른 군집이다. 

저 1~4호분 뒤에도 무덤으로 생각하던 흔적이 있어, 무령왕릉 발굴 뒤인 1970년대인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했지만 무덤이 아닌 제단祭壇 같은 시설로 드러났다. 그 모양은 흡사 석촌동 방단적석총과 같았으니, 3단이었고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사각형이었다. 

무덤이라면 시신을 매장한 흔적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시설은 전연 없었고, 대신 그 한복판 맨아래층에서 이른바 삼족기三足器라 일컫는 전형적인 백제토기 한 점이 꼴랑 나왔을 뿐이다. 

이를 윤근일 선생이 팠다. 

이 방단유구는 한성도읍기 백제와 웅진도읍기 백제의 직접 연결을 증언하는 거의 유일한 증인으로 간주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현재 알려지기로는 백제는 한성시대에는, 적어도 그 중말엽에는 방단적석총을 썼음이 분명한데, 475년 한성이 함락하고서 웅진으로 도망치고서는 그 전통을 일시에 버릴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그 직접 연결점이 도무지 찾기가 힘들어 이것이 나로서는 참말로 미스터리라 할 만하거니와, 그런 점에서 저 방단적석유구만큼은 오직 한성시대 백제의 직접 전통이라는 점에서 그 중대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삼족기 달랑 한 점 나왔기에 그 축조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저것이 한성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저 방단유구는 한성도읍기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풍납동 일대에 살던 한성사람들이 웅진에 정착하고서 그 직후에 만든 흔적으로 본다. 

그 기능은 도무지 나로서도 이렇다 할 이론을 제시할 수는 없거니와, 무덤 제사 혹은 무덤 관리와 관련한 시설일 것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백제시대에 저들 왕가 공동묘지가 위치한 산을 등관登冠이라 불렀거니와, 왕가의 공동묘지가 위치하는 까닭에 산 자체가 더 신성시되었을 것임은 불문가지 하거니와, 그런 까닭에 저 방단석축은 산상제전을 지내던 제단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 1~4호분이라는 번호를 처음으로 매긴 이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사람이다. 메이지대학을 나오고 1927년 부임 이래 1940년 무렵까지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재직하면서 공주 일대 백제무덤 1000여기를 무단으로 파헤친 악랄한 도굴꾼이다. 

그가 저들 고분에다가 번호를 부여하면서 구별했으니, 유의할 점은 현재 1~4호분이라는 번호를 가루베가 애초 부여할 적에는 거꾸로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4호분이 그가 매긴 1호분이었고, 1호분이 4호분이었다. 그런 번호가 어찌하여 어느 시점에 뒤집어졌는지는 내가 옛날에 추적하다가 중단한 일이 있다. 

1~4호분 전면 소나무 숲에 7·8호분이 땅속에 묻혀 있고, 나아가 이번에 발굴한 29호분이 무령왕릉 전면에 위치한다. 저 지도를 보면 오른쪽 하단에 29호분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애초 무령왕릉은 송산리고분군 제7호분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밝혀진 마당에 번호를 매길 이유가 없어 지금은 그냥 무령왕릉이라고만 부른다. 

지금은 봉분을 봉긋봉긋 만들어놨지만, 백제시대에는 저리 하지 않아서, 그것이 위치한 산 자체를 봉분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저 전체 산이 산릉山陵이다. 

괜시리 신라 흉내 낸답시고 저런 식으로 봉분을 만들어놨는데 걷어치워버려야 한다. 저들 무덤 중에 무령왕릉과 5호분, 6호분, 그리고 4호분이 내부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저 중에 나는 4호분만 들어갈 기회가 없었고 나머지는 다 내부까지 둘러봤다. 

무덤 구조로 볼 적에 1~4호분, 그리고 5호분이 백제 전통이라 할 만한 석실분이라, 돌방을 만들었으되, 6호분과 무령왕릉은 잘 알려졌다시피 전축분이라 해서 벽돌무덤이다. 

29호분은 독특해서 짬뽕이다. 즉, 바닥은 벽돌을 깔았지만 나머지 벽체랑 지붕은 돌로 쌓았다. 이와 흡사한 데가 바로 최근에 공주대박물관이 재조사한 교촌리고분이다. 이 고분은 바닥과 벽체만 벽돌이요 그 위는 돌이다. 

얘기가 한없이 길어진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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