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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경주 꺽다리 이채경 회고록》(2) ‘경주유적지도’와 ‘경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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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초 어느날 당시 경주시의 박광희 시장님과 국립경주박물관 지건길 관장님이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지건길 관장님이 박광희 시장님께 이런 요청을 하였다.

“시장님 잘 아시다시피 경주시는 신라천년의 수도였으며, 고려~조선시대에는 지방의 중심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전 시대에 걸쳐 수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경주시에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관내의 모든 문화재를 지도에 표시하여 한눈에 알아보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문화재가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데 용이한 기초자료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경주의 장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입니다. 우리 박물관에서 이러한 사업을 하고 싶어도 사업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장님께서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장님, “그거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사업비는 얼마 정도가 필요하지요?”

박물관장님, “오천만원 정도면 가능할 듯합니다.”

시장님, “알았습니다. 마련해보겠습니다. 좋은 성과를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관장님, “고맙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서울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송파일대 

 

며칠 뒤 아침 간부회의에 갔다 온 당시의 김백기 문화과장은 과의 예산담당 직원에게 긴급하게 지시한다.

“시장님 긴급특별지시사항이다. 지금 당장 내년 예산에 ‘경주유적지도’ 제작 사업비 오천만원을 시비(市費)로 예산계에 요구하라.” 예산계에서는 바로 난리가 났다. “아니 지금 시의회에서 내년 예산 심의가 마무리단계인데 지금 이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우리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시장님 긴급특별지시사항이니 알아서 해라”

며칠 후 시의회 본회의가 모두 끝나고 예산서를 받아보니 사업비 오천만원이 예산에 반영되어 있었다.

1995년 새해가 되자 나는 시장님과 박물관장님이 약속한 ‘경주유적지도’ 제작사업을 시행하고자 사업일정을 협의하기 위하여 박물관 학예연구실을 방문하여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정작 학예연구실 직원들은 모두들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장님과 박물관장님이 이 일을 추진하기로 약속하여 예산이 마련되었으니 어쨌든 박물관에서 이 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물관에서는 사업을 하려면 사업비가 최소한 일억원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1995년 1월 1일부터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되어 통합 경주시가 됨으로서 면적만해도 서울특별시의 약 2.2배나 되는 1,324.82㎢의 방대한 지역의 수많은 문화유적을 일일이 조사하여 기록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문화유적분포지도 

 

시장님과 박물관장님의 의논은 시군통합전 경주시를 대상으로한 생각이었다고 여겨졌다. 결론을 짓지 못하고 돌아와서 계장과 과장에게 출장결과를 보고하고 내 생각에는 이 사업은 연차사업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확보된 오천만원은 금년도 사업으로 하고 내년 예산에 추가로 오천만원을 더 확보하여 사업을 마무리 짓자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또 달라서 확보된 예산만큼만 하자고 하거나 예산을 반납하고 사업을 포기하자는 등 설왕설래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이 사업을 해야한다고 고집하고 내년 예산에 추가로 오천만원을 반드시 확보하여 달라고 계장과 과장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박물관과는 연차사업으로 사업을 진행하되 다음해에 추가사업비 오천만원을 반드시 확보해주는 조건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사이 박광희 시장님은 4월달에 경북도청으로 이임하고 김지순시장님이 부임하였다가 7월 1일부터는 민선 1기가 시작되어 관선 경주시장을 역임하셨던 이원식시장님이 민선시장으로 부임하셨다. ‘경주유적지도’ 제작을 위한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박물관에서 계속 시행하고 있었고 연말 내년예산 심의에서 추가사업비 오천만원이 통과되어 1996년까지 2년동안 현장조사를 계속하였다.

그 사이에 박물관장도 강우방 관장으로 바뀌었다. 1997년 6월 30일에 그동안의 조사성과인 1,433개소의 문화유적 분포지역을 1/10,000 지형도에 표기한 지도책자가 세상에 나왔다.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이 사업의 전 과정을 시장님께 상세히 보고드렸다.

마침 그해 6월 중순에 당시 정문교 문화재관리국장님이 경주시를 방문하여 시장실에서 시장님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시장님이 문화재관리국장님에게 “우리시에서는 순수 시비로 사업비 일억원을 들여서 전국에서 최초로 이런 사업을 진행하여 곧 그 성과물이 나오는데 경주시 문화재보존관리의 기본바탕이 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고 떡 벌어지게 자랑을 늘어 놓았다.

이 말을 들은 정문교 국장은 돌아오자마자 간부들에게 “경주시에서는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여 곧 성과물이 나온다는데 알기나 하냐?”고 질책하고 이런 사업은 우리 문화재관리국에서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인데 지금 경주시에서 먼저 시작하였다며 경주시의 자료를 받아보고 당장 내년부터 전국사업으로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문화재관리국 유형문화재과와 기념물과에서는 경주시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업을 하게 되었냐며 관련자료를 좀 보내달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보내주었더니 다음해부터 바로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하는 전국사업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서울 강북 문화유적분포지도 

 

6월 30일에 ‘경주유적지도’가 세상에 나와서 전국의 주요 도서관, 박물관, 문화재관련기관에 배포되자 관련 연구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자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1,000부 비매품 한정판으로 발간하였기 때문에 그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부득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박물관과 협의하여 보급판을 내기로 하고 도서출판 학연문화사에서 보급판을 출판하여 시중에 판매하도록 함으로서 수요를 감당하였다. 

그리고 이 책자를 문화재 보존관리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특히 매장문화재 분포지역으로 표기된 지역은 각종 개발사업이 시행될 경우 불문곡직하고 발굴조사를 선행시켰다. 그러다 보니 이전에 비해서 발굴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원성도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특히 나는 자연히 그 원성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경주시청에서 가장 지독한 나쁜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급기야 1년 뒤인 1998년 7월달에는 시의회 행정사무감사장에 증인으로 불려가서 이틀에 걸쳐 다섯시간동안 시의원들의 닦달을 받았으나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따박따박 받아치고 싸우며 나를 닦달하는 시의원들에게 문화재학 강의를 하다시피하여 더욱더 아주 지독한 나쁜놈이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문화재보존의 절대원칙을 고수하면서 끝까지 싸웠던 이유는 [만약 이 자리에서 내가 한 발이라도 물러선다면 앞으로 나는 문화재보존을 위하여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겠다.]는 위기의식과 [그래 나는 정당한데 너희들이 나에게 왜 이런 부당한 압력을 가하느냐. 그래 어디 한번 해볼테면 끝까지 해보자.]라는 반발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경주유적지도’ 제작사업을 시작한지 10년째 되던 해인 2004년 경북도청 문화유산과에서 연락이 와서 ‘경주유적지도’ 증보판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면서 문화재청의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사업도 이제 마무리 단계이니 내년 예산에 사업비를 신청하자고 하였다.

그동안 추가로 확인된 유적도 많고 하여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 있던 차였던지라 사업비를 신청하였다. 2005년 사업비로 국비와 지방비를 합하여 일억오천만원을 받았는데 초판을 만들었던 박물관에 다시 증보판 제작사업을 협의하였더니 10년이 지난 지금 경주시의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문화유적을 새로 조사하여 증보판을 만들려면 사업비가 이억오천만원을 되어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전국 시군의 규모나 특성을 고려하지않고 일괄적으로 시군별로 동일 금액의 사업비를 배분하였던 것이기에 문화재청의 담당계장이었던 정계옥 연구관에게 경주시는 이런 특성이 있음을 참작하여 다음해에 추가사업비를 배정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하였다. 그랬더니 갑자기 사업비를 내려주었으면 사업을 제대로 할 생각은 안하고 돈을 더달라고 한다고 온갖 악다구니를 다 퍼부었다.

 

문화유적분포지도 풍납토성

 

하도 어처구니가 없고 더러워서 나도 빡친 김에 ‘왜 당신 별명이 “정마녀”로 불리는지 알겠다.’고 소리지르고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과장, 국장, 예산계장 등을 차례로 설득하여 다음해에 시비로 일억원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이번에는 박물관의 여건이 여의치 않아 2005년 12월 중순에야 사업을 착수할 수 있었고, 약 3년에 걸친 현장조사와 자료 편집을 거쳐 2008년 11월 30일에 기존의 ‘경주유적지도’에 수록된 1,433개소의 분포지역에서 935개소가 추가되어 2,368개소의 분포지역이 수록된 증보판이 ‘경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경주시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경주유적지도’를 시작으로 전국 모든 시군의 ‘문화유적분포지도’가 만들어지고 이것을 바탕으로 문화재청에서는 GIS 인트라넷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국의 문화유적 분포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 ‘경주유적지도’가 있었고 이 사업과 10년 뒤의 증보판 제작사업을 내손으로 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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