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 말기 문사文士 유향劉向이 찬한 설원說苑 중 제1편 군도君道, 즉 임금이 가야할 길 첫 머리다.
진晉 평공平公이 사광師曠한테 물었다.
“임금이 가야 할 길은 어떠오”.
대답하기를
“임금의 길은 맑고 깨끗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힘쓰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일을 맡기며, 귀와 눈은 널리 펴고서 만방을 살피되, 세속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측근들한테 휘둘리지 않아야 하며, 탁 가슴을 연 채 멀리 바라보면서 홀연히 서야 하고, 신하들이 한 일을 잘 살펴서 신하들에게 군림하는 일이니 이것이 바로 임금 노릇하는 요체입니다.”
평공이 말하기를
“옳습니다”
晉平公問於師曠曰:「人君之道如何?」對曰:「人君之道清淨無為,務在博愛,趨在任賢;廣開耳目,以察萬方;不固溺於流俗,不拘繫於左右;廓然遠見,踔然獨立;屢省考績,以臨臣下。此人君之操也。」平公曰:「善!」
인군지도人君之道는 청정무위清淨無為해야 하며 이목耳目을 광개廣開하여 만방萬方을 찰察하는 것을 요체로 꼽았거니와,
당장 무위를 설파하며 그 방식으로 눈과 귀는 부릅뜨고 천지사방을 잘 살피는 일이라 했으니 이것이 바로 황로학黃老學 요체다.
저 광개가 고구려왕 담덕談德 시호에도 쓰인다.
이런 임금이 생각보다 피곤하다. 왜? 저 정치는 결국 국정원 정치인 까닭이다.
왕건이가 고려왕조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4인방 개국공신 중에서도 복사귀, 일명 복지겸이 바로 저 일을 담당했는데, 국정원장을 맡아 불평분자를 색출하는 일을 전담한 까닭이다.
결국 황로학은 정보정치였다.
물론 저 말을 액면대로 실천하고자 한 조선시대 정치인도 없지는 않았으니 세종 시대 오래도록 눌러앉아 꿔다논 보릿자루 재상 역할을 한 황희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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