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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기를 확정해야 하니 왕릉급 기준으로 백제가 저런 식으로 변모한 것은 확실히 475년 웅진 천도 이후이며 망할 때까지 저 골간을 유지했다.
다시 말해 저 기간 동안 백제는 산 구릉에다 기본으로 묘광을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다가 시신을 매장했다.
이 경우 산 혹은 구릉 자체가 봉분이라 봉분을 크게 만들지는 않아 높이라 해 봐야 일미터 남짓하다.
동시대 신라는 왕청 나게 달라 지증왕 때까지는 평야에 쓰다가 법흥왕 이후는 경주 분지를 탈출하면서 입지조건은 백제랑 비슷해져 구릉으로 이동한다.
다만 외곽으로 가기는 해도 일부는 여전히 평지를 고수하기도 한다.
문제는 본능.
신라는 결코 기슭으로 가도 우람한 봉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산더미만한 봉분을 쌓아 이곳이 무덤임을 표식했다.
동시대 가야는 조금 달라서 나아가 것도 세부 문화권별 차이가 있어 백제랑 신라를 짬뽕한 듯한 느낌을 준다.
가야는 근간에서 날망을 좋아한다. 능선이 아니라 아예 능선 줄기를 따라 봉분을 거대하게 만든다.
고구려는 능선과 평야를 복합한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까지는 고고학이 아니다.
왜? 기술 description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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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 무덤 유물이 압도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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