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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광개토왕비? 장수왕비? 그 새로운 독법을 위한 한 시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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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광개토왕비 탁본이요 오른쪽은 창원 봉림사 진공대사탑비 탁본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내 대가리가 大頭級이란 사실을 잘 안다. 이런 내 머리통에 광개토왕비는 두 줄이 들어갈 뿐이요. 진공대사탑비는 10줄이나 들어간다. 광개토왕비가 얼마나 비효율성으로 점철하는지 이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 있겠는가?



어제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자, 그 후' 특별전 개최와 맞물려 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자리에서 나는 '광개토왕비,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라는 題下의 발표문에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1. 이른바 광개토왕비에서 陵과 墓라는 글자가 엄격히 구별돼 사용되고, 전자가 광개토왕릉임에 대해 후자는 이를 포함한 고구려 선대 왕릉 전반을 포함하는 왕가 전체의 묘역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는 광개토왕릉이라는 단일 왕릉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고구려 전체 왕릉 묘역 수호를 위한 법령 포고비다.


2. 나아가 이들 왕가 묘역 전체 관리를 위해 광개토왕의 存時敎言에 따라 배치된 수묘인(守墓人. 묘지기) 330家는 중국 황제릉에서는 흔한 능읍(陵邑)의 일종이며, 그들 330家 중 220家는 포로로 충당하면서도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로서 110家를 충당토록 한 것은 이들의 반란 혹은 소요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3. 광개토왕비는 건립시점이 광개토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른 다음, 왕릉에 안장하는 바로 그날, 그러니까 장수왕으로서는 탈상하는 그날인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바로 이 시점에서 장수왕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직접 친정(親政)을 실시한다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한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이 비는 광개토왕비가 아니라 실은 장수왕비다.


이런 入論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먼저 1과 관련해 나는 고증학적 접근 방식을 도입해 墓와 陵의 차이를 구별하고, 구명했다. 墓는 결코 지금 생각하듯이 개별 봉분을 갖춘 무덤이 아니라 先瑩이다.


2와 관련해 나는 330가를 1家당 5명을 봐도 1600명, 신라촌락문서를 전용할 때 1家당 10명이면 3천명,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그것도 누층적으로 필요하므로 이만한 규모 촌락은 당시 국내성 사정을 고려할 때 '신도시'다.


3과 관련해 이른바 광개토왕비 핵심은 마지막 수묘인 관련 법령 공포이니, 떵떵거리며 사는 놈들에 대한 협박성 문구로 일관하는 이 구절이야말로 광개토왕과는 하등 관련이 없고, 장수왕의 공포한 법령이라는 점을 많은 이가 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른바 광개토왕비 비문 전반에 대해 문장론이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시도하여, 이는 초급과 중급, 고급 수준을 왔다갔다 하는, 기자로 치면 수습기자 수준의 문장이라고 정리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문장에 반복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그리고 나는 비문은 새기다 말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碑身 자체는 거대하기 짝이 없으나 그 四面 전부를, 맨마지막 칸까지 모두 글자를 빼곡히 채웠음에도 전체 새긴 글자 숫자는 1,775자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글자를 너무 크게 하는 바람에, 중간에 많은 문장의 탈락이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며, 이것이 결국 비문 전체의 문장 체제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쳐 왜곡을 가져왔다고 나는 본다.


요컨대 이른바 광개토왕비문은 그것을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증명하는 욕망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버리고, 그것이 이 지구상 가장 단순무식한 기념물로 되돌려 놓아야지, 비로소 그 실체에 어느 정도 우리가 다가갈 수 있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어제 내가 강조하려한 세 가지를 앞으로는 나는 각기 개별 논문으로 독립해야 할지를 고민 중이다.


하지만 저 중에서도 첫번째, 비문에 9차례나 보이는 墓가 광개토왕陵이 아니라 고구려 선대 왕가의 墓域이라는 주장이 지지를 받는다면, 이는 120년 동안 계속한 광개토왕비에 대한 연구 전체를 근간에서 흔드는 주장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상은 November 19, 2011 at 6:48 AM 글이다.)  




***


이 발표는 나중에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라는 제목으로 공간되었거니와, 그 초록과 목차 그리고 영문초록은 아래와 같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부왕父王의 운구運柩 앞에서 청년왕靑年王이 보낸 경고

Stele of King Gwanggaeto, or Stele of King Jangsu


金台植(연합뉴스)


한국고대사탐구학회 / 《한국고대사탐구韓國古代史探究》 第10卷 / 2012.04 / 5 - 33 (29 pages) KCI등재


초록

中國 吉林省 集安市 동쪽 禹山下古墳群에서 19세기 말에 발견된 고구려 시대 거대 비석을 우리는 흔히 ‘廣開土王碑’로 부른다. 이러한 명칭은 이 비석이 그의 아들 長壽王이 죽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과 영광을 찬양하고 선전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전제를 깔았으며, 실제 이런 이해가 이 분야 직업적 학문 종사자 사이에서도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를 과연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우선 이 비는 광개토왕(릉)만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광개토왕릉을 포함하는 고구려 先代 왕들의 무덤이 밀집한 왕가의 공동묘지(royal cemetery) 전체 관리에 대한 사항을 규정한 기념비라는 점에서 그렇게 부르기는 힘들다. 이 비석 자체에는 왕가 공동묘지의 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한 엄격하고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광개토왕이 구상한 것처럼 기술되지만 우리의 분석은 이런 관리 시스템은 장수왕의 생각이었다. 설혹 이런 시스템이 그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생각이었는지 모르나 그것을 실제 실행에 옮긴 이는 장수왕이었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무엇을 위해 생각을 했고, 이를 통해서 어떤 효과를 누렸을까?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비는 장수왕의 親政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런 분석은 이 비에 담긴 내용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는 신성불가침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선대 왕릉 묘역의 권리를 침범하는 당시 유력 권력자들에 대한 경고로 일관한다. 요컨대 이 비문 내용은 신성불가침 구역을 침범하지 말고 또한 이들 구역을 관리하는 묘지 관리인들을 사사로이 매매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고가 진정한 친정을 시작하는 젊은 왕의 선전포고와 같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광개토왕비는 21세 젊은 왕이 재위 시절 절대 권력을 휘두른 아버지의 카리스마를 빌려 왕국을 통치하고자 한 기념비로 보며 따라서 이 비는 ‘by 장수왕, for 장수왕, of 장수왕’으로서의 장수왕비로 불러야 한다고 본다.




The enormous stele found in Jian, China, which was the early capital city of Goguryo, is most commonly called as the Stele of King Gwanggaeto. The name comes from the basis that the son (King Jangsu) erected the stele to honor and propagate his father’s achievements and this understanding is commonly accepted amongst scholars in this field. In order for it to be called the Stele of Gwanggaeto, the stele has to satisfy one or more of the following three conditions. The stele must be either of Gwanggaeto, by Gwanggaeto, or for Gwanggaeto. 


However analysis on this stele does not yield results that satisfy any of these conditions. In fact the Stele of Gwanggaeto is by all means, of Jangsu, by Jangsu, and for Jangsu. According to the analysis, this stele was not erected to honor just the tomb of Gwanggaeto as is commonly accepted, but rather is a monument that stipulated the regulations for managing the entire royal cemetery of the Goguryo kings, including the tomb of King Gwanggaeto. The engravings on the stele elaborates as though the organized system of management was devised by King Gwanggaeto, but on a closer look it can be conjectured that the system was in fact operated by King Jangsu. It may have been King Gwanggaeto’s idea but the person executing it to real life was King Jangsu. Then what was the motive of King Jangsu, and what effects were he aiming for?

Various sources including those written on the stele gives us the information that King Jangsu was 18 years old when he took the throne. Initially it would have been very difficult for him to exercise strong powers as king, however this stele was erected when he was 21 years old, ending the three years’ mourning period for his father. In the traditional East Asian succession system, the timing of becoming a genuine independent “King” starts when the three years mourning period for the previous king has ended. With this in mind, it can be considered that King Jangsu finally became the real king of Goguryo when he erected this stele, rather than when he took the throne.


This stele was a signal informing the shift of power to King Jangsu, and this can be confirmed from the contents of the stele. The epitaph concentrates mainly on giving warning to the influential powers that intruded the royal cemetery of the Goguryo Kingdom. It specifies not to trespass the cemetery of sanctity and not to privately buy or sell off management officials of the area.


This warning can be considered as a declaration of a young king that has started to exercise his power. In this context this stele is a monumental evidence of a 21 year old youth attempting to control his kingdom by borrowing his powerful father’s charisma, and because of that, should be called the Stele of Jangsu, by Jangsu, and for Jangsu.




목차

【국문초록】

Ⅰ. 武寧王陵 墓券과 廣開土王碑

Ⅱ. ‘墓’와 ‘陵’

Ⅲ. 高句麗王家의 墓域과 守墓人村

Ⅳ. 長壽王, 그 親政의 기념비

【참고 문헌】

Abstract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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