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구석기유적은 일부 동굴 유적을 제외하고는 모든 현장이 이런 난관에 봉착하다.
구상화가 불가능하다.
눈으로는 볼 게 없고
귀로는 들을 게 없으며
손으로는 만질 게 없다.
이곳이 열라 중요한 유적이라는 강박 가득한 안내판 하나랑 족보도 없는 조형물 몇 개, 그리고 잡풀 들판이 전부다.
개중엔 전곡리며 석장리 같은 데 박물관이 있어 구상화를 꾀하지만 그런 데서도 막상 그 현장 어디에도 구석기 체취는 없다.
이곳 광주 삼리 구석기 유적 또한 그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어 이럴 거 뭐하러 보존하는가를 묻게 된다.
구석기 구상화는 한국문화재학이 봉착한 가장 큰 난관이다.
현지 입간판 설명은 아래와 같다.
광주 삼리 구석기 유적 廣州三里舊石器遺蹟
Paleolithic Site in Sam-ri, Gwangju
경기도 기념물 제188호
Gyeonggi-do Monument No. 188
광주 삼리 구석기 유적은 노곡천과 곤지암천이 서로 합류하는 서쪽 부분에 위치하며, 유적 언저리에는 나지막한 산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사철 메마르지 않는 물줄기가 발달하여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은 당시 구석기인들의 삶에 알맞은 생활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삼리 구석기 유적은 1986년 중부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지면서 찍개, 긁개, 밀개 등 약 21점의 석기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후 2000년 삼리 세계 도자기 엑스포 행사장 부지조성에 앞서 실시한 시ㆍ 발굴조사를 통해 몸돌, 격지, 흑요석 등 약 4000여점의 석기가 출토되면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았고, 2003년 경기도기념물 제188호로 지정 ㆍ 보호되고 있다.
또한 2015년 정밀 시굴조사 결과 구석기 유적 전체에 걸쳐 고토양층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토양층에서 몸돌,
격지, 좀돌날 등 약 50여 점의 석기가 추가로 출토되어 중ㆍ후기 구석기시대 한강 이남 경기지역 대표 선사 유적지로서 매우 의미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재평가 되었다.
The Paleolithic Site in Sam-ri, Gwangju is located near a hill at the confluence of Nogokcheon Stream and Gonjiamcheon Stream, to the south of the Hangang River. Water was abundant all year round.
Such a geographical location must have provided people of that time with a good dwelling place.
The site was excavated during the construction of the Jungbu Expressway in 1986, yielding about twenty
stone tools including chopper, scrapers, and end-scrapers.
Another excavation survey of the site, conducted for the Sam-ri World Ceramic Expo in 2000, discovered approximately 4,000 stone tools including core stones, flakes and obsidian at the paleosol layers.
The site was designated as Gyeonggi-do Monument No. 188 in recognition of its historic importance.
Following a precision excavation survey conducted in 2015 that produced more than fifty stone tools, the site began to attract attention as a major historic site of the mid and late Paleolithic Age.
QR코드를 통해 제공 정보는 다음이다.
광주삼리구석기유적
수량/면적 일원(3,888)
지정(등록)일 2003.04.21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삼리 11
‘광주 삼리 구석기 유적’은 발리봉의 북동 방향으로 갈라져 나온 여러 개의 구릉지 하단부(해발 75~85m)에 위치한다.
유적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의 아주 늦은 시기부터 후기 구석기 시대 후반에 이르는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또한 문화층에서는 유적 주변의 석영과 규암을 이용하여 만든 찍개, 여러면석기와 같이 크고 무거운 몸돌 석기와 주먹도끼, 긁개, 밀개, 홈날, 톱니날 등의 작은 격지 석기 4,000여점이 출토되었다.
위층으로 갈수록 다양한 종류의 돌감이 확인되고 작고 예리한 격지 석기의 비율이 높아진다.
특히 가장 위의 1문화층에서는 흑요석으로 만든 좀돌날과 뚜르개, 슴베찌르기, 새기개 등이 출토되어 후기 구석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시굴 조사에서는 670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1문화층과 관련된 흑요석 석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으며, 유적의 동쪽 지역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보다 이른 4문화층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은 한강 유역에서 조사된 구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유적 범위가 넓은 곳 가운데 하나이다.
문화층에 따른 석기 출토 수량도 많기 때문에 한반도 중부 지역의 구석기시대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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