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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고고학이 공공성을 떠나 존립할 수는 없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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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정북동토성 뿐인가? 저 광활한 능산리 절터 운동장에 한여름에 서면 숨이 막히고, 한겨울에 서면 살이 언다. 저런 현장을 주물해 내는 데가 한국 고고학이다.

 
내가 줄곧 청주 정북동토성 문제를 거론한 이유는 물론 작금 고고학 비판이라는 겨냥도 부인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이를 통한 그 외연 확장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내가 본 고고학, 특히 한국고고학은 보고서 발간을 궁극으로 삼는다. 이 보고서 발간이란 말에는 그것이 대표하는 이른바 연구성과도 포함한다. 내가 본 고고학은 딱 여기까지이며 보고서 이후, 보고서 너머를 고민한 적이 없다.

예서 고민이란 철학의 정립이며 그 철학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뿌리를 떠날 수는 없다.

모든 고고학 현장이 발굴조사 완료와 더불어 잡풀더미 혹은 잔디밭 혹은 광활한 운동장으로 변모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너머에 대한 고민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내가 또 매양 고고학을 한다는 주체의 해방이 이뤼져야 한다는 믿음 또한 그와 같은 궤를 이룬다.

고고학은 저 고고학을 하는 주체를 오로지 땅을 팔 줄 알고 토층을 구분하며 실측을 하며 보고서를 쓸 줄 아는 사람으로 국한하고자 한다. 그런 자만이 고고학도라는 자격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걸 좋게 말해 협의의 고고학이라 하겠지만 저런 고고학은 현실이 당면하는 문제, 곧 저 협의를 벗어나서 그 외곽을 포위한 공동체가 요구하는 그 어떤 수요도 충당할 수 없다.

바로 이에서 새로운 고고학의 필요성이 대두하는 것이며 그 새로운 고고학은 오직 주체의 해방에서 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른바 작금 저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개설한 대학 학과 커리쿨럼을 볼짝시면 그 어디에서도 보고서 너머의 고고학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움직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종해서 우리는 첫째 왜 파는가를 물어야 하며 둘째 어떻게 파야 할지를 물어야 하고 셋째 파고나서 어찌할지를 동시에 물어야 한다.

모든 발굴현장이 파고 나서 황량한 잡풀더미 잔디밭으로 변모한 가장 큰 원인이 이런 고민이 결여한 데서 말미암는다. 솔까 이런 고민 혹은 그를 향한 철학의 부재는 저들이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고, 고민한 적도 없는 까닭이지 기타 무슨 우수마발 같은 이유가 있겠는가?

오로지 배운 것이라고는 파서 보고서 내고 논문 쓰는 일이 고고학 본령이라는 것인데, 거기에서 무슨 그 너머가 보이겠는가? 

왜 파는가? 발굴 중에서는 이른바 학술발굴에 주로 국한하지만 흔히 보존정비 차원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 보기엔 그 파는 이유와 보존정비가 연결되는 지점을 나는 단 한 군데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더구나 그 논리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보존정비를 위해서는 결코 파서는 안 된다. 발굴은 곧 파괴라는 입 발린 말 신물이 난다.    

이 심각성을 아무도 묻지 않는다.

왜 묻지 않는가? 단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이런 말에 저들이 어찌 나올지 안봐도 야동이지만, 문화재 활용을 우리도 고민한다 뭐 이런 처방전을 들이대겠지만, 그 활용이라 해서 남발하는 그 말만 해도 실상 고고학의 고민이 아니라 실은 다른 사람들 몫에서 출발했다는 심각성을 심각히 물어야 한다.

시종해서 말하지만 파는 이유는 보고서를 내기 위함도 아니요, 그걸로 시덥잖은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건 판 놈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몇 놈이 독점하는 특권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딴 보고서, 그딴 연구, 또 그를 통한 사적 혹은 기념물 지정이며 혹은 전시관 박물관 건립이 궁극으로 공공에 이익이 된다 설레발치겠지만, 솔까 무엇을 파서 어떤 성과를 얻었다는 것과 저와 같은 지정 혹은 건립이 공동체 구성원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건 그네가 얻어가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지,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는 눈꼽만큼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에서 고고학은 공공성을 표방하는 주체의 해방이 되어야 하는 당위가 출발하는데, 파는 일도, 보고서를 내는 일도, 또 파고 나서도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는 철저히 이 공공성이라는 영역을 떠날 수는 없다. 

작금 고고학이 주입해야 하는 것은 공공이며 공동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한국고고학을 국한하면 이 공공성은 제로다. 이 공공성은 단순히 요새 문화재 현장을 난무하는 활용 혹은 그를 위한 활용프로그램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고작 땅 파고 실측하고 보고서 내는 일을 전부 혹은 본령으로 아는 작금의 고고학은 이제는 구시대 유물로 시궁창에 던져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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