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모든 관계를 닫아버린 고려는 현종 7년, 1016년 연호마저 개태開泰라는 거란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선 북송北宋 연호인 대중상부大中祥符를 채택해 쓰기 시작한다.
한데 이 일이 이상한 점은 앞서 보았듯이 거란을 버리고 이제 다시 宋을 섬기겠다는 고려의 요청을 宋이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미 그 자신도 거란에 신속해 버린 송은 거란 눈치를 봐서 고려를 외방外邦 제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완곡히, 그러면서도 분명히 했다.
다만 그렇다 해서 송으로서도 그러지 말라 말릴 처지도 아니었다. 지들이 좋아서 지들 맘대로 한다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음 그만이었다.
나는 고려가 실제로 宋으로부터 무슨 실질적인 지원, 예컨대 군사지원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고려가 등신이 아닌 이상 당시 거란-송 관계가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저 북송 연호 사용은 거란 엿먹이기 전략 일환이라고 본다.
물론 그에 따른 실질 보상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문물제도는 당대 송을 따를 데가 없었다. 이 선진문물은 고려로서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고려가 송에서 절실했던 것은 바로 문화였다.
그 후속으로 이듬해 1017년 7월에 고려는 서희 아들로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서눌徐訥을 대표 단장으로 삼은 대규모 사절단을 송에 보내서는 방물을 헌상한다.
종주국 대 제후국 관계가 아니었을 때는 내방이었지만 이때는 조공이었다.
문제는 宋. 방물이라지만 뭐 당시 없는 게 없던 송에 뭐가 절실했겠는가? 변변찮은 방물을 받아놓고선 그보다 몇 십 배 나가는 보물들을 내어주어야 하는 곤혹스런 처지가 눈앞에 선하다.
당시 송은 한 푼이라도 더 아껴 군비에 충당해야 했다.
이런 어정쩡한 관계가 청산되기는 1022년 4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귀주대첩 대승이 있은지 3년 뒤, 고려는 다시 거란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닫아버린 두 왕조 사이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후 두 나라는 거란이 망할 때까지 향후 100년간은 조공 책봉 관계를 근간으로 삼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시기, 그러니깐 거란이 고려와 화해하고 진군을 멈춘 시대가 곧 거란의 황금시대가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정복을 성장 동력으로 삼는 거란은 이후 정복욕을 급격히 상실하면서 수성하며 정주하는 문명으로 정착해 그런 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다 결국 몰락에 이르고 말았다.
한편 고려의 이와 같은 변덕을 보는 宋은 심정이 어땠을까? 고려는 쥐새끼 같아 믿을 수 없다는 동파 소식의 말은 정곡을 찔렀고, 고려를 향한 그네들 아니꼬운 반응을 대변한다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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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2) 거란 버리고 宋에 접근했다 쌩까인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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