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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되치기 당한 무신, 장교로 임명되는 문관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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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불만은 누적한 상태였다.

 
한국사를 보면 문반과 무반 그 양극화는 아무래도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을 분기점으로 삼아야 할 성 싶다.

신라를 보건대 그 이전에는 말 그대로 출입장상出入將相이라, 문무반 구분이 엄격치 아니해서 장군이 곧 재상이었고 재상이 곧 장군이었다. 

이런 시대가 일통삼한이 되면서 급속도로 문관 일변도로 변해간다. 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된 까닭이다. 그러다가 신라말이 되면서 이제 300년을 움츠린 막부시대가 개막한다. 

진성여왕 시대는 그 고비였으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삼국사기 말은 곧 막부시대가 개막했고, 다시 군인들의 시대가 왔다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왕건 자신도 막부정권 지도자였고, 실제로 그 수하 장수들한테 엎혀서 느닷없이 쿠데타로 집권하고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마상馬上에서 통치를 할 수는 없는 법. 이내 등자를 밟고 지상으로 내려선 왕건은 문치文治 시대를 열었다.

4대 광종 시대가 오면서 과거를 통한 관료 선발이 일반화하면서 이제 고려는 걷잡을 수 없는 문관 독패 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무관들도 가만 있지는 않았으니, 무엇보다 거란과의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전투가 북방 변경과 동해안 루트를 통해 일어난 까닭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만은 팽배할 수밖에 없었으니, 노골화한 차별에 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하는 군인들

 
강조의 정변은 그 신호탄이었고 실제 짧은 기간이지만 막부정권을 수립했고, 그 얼마 뒤에는 김훈과 최질이 막부시대를 열었다. 그들 역시 몇 달 만에 패몰하고 말았으니, 그렇게 한 번 타도된 군인들이 기지개를 켜기 위해서는 다시 백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뭄에 콩나듯하지만 그 차별을 뚫고서 재상까지 오른 무관도 더러 있었다.

현종 8년, 1017년에 사망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안소광安紹光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라 그는 대대로 무관 집안 자손이다.

고려사절요 그의 졸기에 이르기를 "체격과 용모가 우람하고 또한 기세를 부렸으며, 매와 말을 특히 좋아하니 목종穆宗이 즉위하여 〈자신을〉 보좌하고 추대한 공로를 이유로 숙위를 관장하게 하였으니, 총애하고 우대하는 바가 월등히 뛰어났다"고 했다. 

왕의 총애를 입기는 했지만, 실력 하나로 재상 반열까지 오른 것이다. 
 

집권한 막부 주역들이 패악질을 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그렸지만, 이는 왜곡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반에 대한 무관 차별 완화라든가 그 제도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었다.

현종顯宗 말년인 그 22년, 1031년 2월에는 다음과 같은 조서가 내려온다. 

문반으로서 무예가 있는 자들을 장교將校로 바꾸어 제수하였다. [文班有武藝者, 改授將校]

아예 무관이 맡던 자리까지 문반이 들이친 것이다. 

하긴 뭐 그 전 시대만 해도 문관들인 서희랑 강감찬, 강민첨은 아예 대장군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으니 이 조치가 이상할 건 없지만, 저리 해서 무관은 더욱더 설 땅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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