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은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4_0020_0020_0010_0020#ftid_131)
우리역사넷
(2) 서얼인구의 양적 증가와 질적 변화 조선시대 서얼의 개념 속에는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뿐만 아니라 부계가 사족이더라도 모계쪽의 어느 한 가닥이라도 사족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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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받아왔다.
조선시대 서자 숫자는 최소한 적서 숫자와 대등하거나 이보다 더 많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시대 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전혀 불법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 사이에서 나오는 서출은 서양에서 말하는 사생아와도 달랐다.
적법한 자손이지만 모계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번 결혼하면 고정되어 죽기 전에는 바뀌지 않는 처와는 달리
첩은 숫자도 많을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서출의 숫자는 늘게 된다.
조선후기 적서 자손의 숫자를 살펴본 연구들을 보면
모두 서자의 숫자가 적자 숫자와 대등하거나 더 많고
영조대왕은 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이 서자라는 이야기도 했다니,
이 시대 서자의 숫자가 나라 안에 무시 못할 숫자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18세기 우리나라 족보를 보면,
서자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서자라고 표시하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족보에는 서자와 자(적자)를 달리 표현한 족보들도 있었는데
여기도 서자 숫자가 매우 적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서자가 슬쩍 서자가 아닌듯 족보에 올라갔거나
그게 아니면 서자는 아예 족보에 못올라오도록 빼버린 것이다.
어느 쪽도 둘다 가능성이 있는데 (둘 다 그 사례가 있다),
이 중 후자라면 20세기 우리나라 족보의 인구가 급증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족보에서 후대에 끼어 드는 인구의 상당수는
바로 이러한 서얼의 자손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던 바,
노비 자손 중에 주인 성을 모칭했다는 것, 얼자의 자손,
그리고 족보에 끼어들지 못했던 서자의 자손들이
어느 시점에 족보에 들어오게 된 것이 문중 인구 급증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하며,
그 외에 원래 관계 없는,
성만 같은 두 집안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합본하거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아예 족보를 사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긴 있었을 텐데,
이런 경우는 모든 집안에 골고루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용이한 몇몇 집안에 집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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