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기대인가 하면, 일본서기 기록을 상당히 신뢰할만하다고 보고 그 입장에서 한반도 남부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령왕릉은 기대에 못미쳤을 것이라는 거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송 관짝으로 사실 일본과의 엄청난 관계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 무령왕릉은 재위 중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 그런 관짝하나 안나오는게 더 이상하다. 중요한 것은 금송 관짝도 받아다가 깎고 다듬는건 전혀 왜색이 아니었다.
사실 일본서기를 보면 계체-흠명기 시대는 일본 입장에서 볼때 "임나일본부"의 전성기에 가까운 시대로 이 시대의 백제왕인 무령왕은 그 탄생전승으로 보나 그 전왕인 동성왕의 상황으로 보나 무령왕의 무덤이 발견된다면 훨씬 일본쪽에 경도된 문화가 나올것이라 바다 저쪽에서는 예측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람들 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무령왕릉에서 당시 백제의 "공식입장"을 본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고 시작되는 지석을 보고 일본측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지석 문구의 분위기에서 상당히 실망했을 것이다.
고구려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고 나라가 거의 망할판으로 웅진으로 쫒겨갔지만, 수백년을 이어온 백제의 중심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는것을 무령왕릉에서 본다. 무령왕릉에서 볼수 있는 문화가 저럴진대, 일본서기의 기술에서 어떻게 백제가 쓰여있건 그건 그렇게 중요한것은 아니다.
임나일본부설이 기둥과 서까래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되게 된 내력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령왕릉도 일조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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