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 고려사 김은부金殷傅 열전에는 그가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 출신이라 했으니, 이곳은 지금의 수원과 화성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저런 표현으로는 알 수 없다.
누가 어디 사람이라는 기록이 그가 반드시 거기서 나고 자랐다는 의미가 아닌 까닭이며, 엄밀히는 그 조적祖籍을 말하는 까닭이다.
이 열전에서 우리가 주목할 다른 대목이 있다.
성종成宗 때 견관승甄官丞을 지냈고, 목종穆宗 때에는 여러 차례 전임하여 어주사御廚使가 되었다가, 현종顯宗 초에는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하다가 공주公州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서 마중하면서 (하략)
이를 보면 그는 성종 시대에 중앙 관료 사회에 편입되어 공무원 생활을 하다, 목종 시대에는 어주사로 승진했다.
어주사는 그 정확한 직능은 알 수 없지만, 왕한테 음식을 공급하는 관청 책임자급인 듯하다.
그런 그가 현종이 즉위하자 공주절도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전출했다.
이런 그가 난리통을 만나 피란 중인 현종을 보필하게 되었으니, 나주까지 도망간 현종이 복귀하는 길에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올리게 하니 이 일로 그 딸을 (왕이) 맞아들이니 그가 원성왕후元成王后다.
했거니와
이로써 보면 김은부 딸, 훗날의 원성왕후는 공주에서 아버지랑 함께 살고 있었음을 안다.
물론 난리통에 개경에 살다가 피난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렇지는 않고 아예 지방관으로 발령난 아버지를 따라 일가가 다 공주로 내려와 있었던 듯하다.
동아시아 전통으로 볼 때 지방관으로 발령받은 사람은 일가부치를 데려가지 않는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 지방관은 언제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그 가족은 서울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것을 방지하는 이른바 인질 효과도 있고
둘째 무엇보다 치맛바람을 우려한 때문이다.
지금도 지자체장 중에 지자체장 보다 그 마누라가 더 무서운 존재인 데가 많은데, 저 시대라고 왜 치맛바람이 없었겠는가?
더구나 일가족이 다 내려가면 그들을 먹여살리느라 지역민이 똥을 싼다.
그래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가족을 현지로 같이 내려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김은부 사례를 보면 저 시대 고려 왕조는 그렇지 않은 듯해서 의문을 표시하니, 혹 다른 사례가 있는지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김은부 #고려지방관 #지방관발령 #고려거란전쟁 #고려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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