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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란 침공에 부활의 팡파르를 울린 팔관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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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종은 종교 성향이 좀 묘한 구석이 있어, 정치에서는 철저히 유가 지향을 보인 반면, 그 시대 국교라 할 만한 불교 역시 열심히 신봉했다. 

이 둘은 주자성리학이 착근하기 전에는 실상 그닥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유불도儒佛道 중에서는 유독 불교랑 도교가 서로 맞지 아니해서 죽자사자 대판 쌈박질을 벌였지만, 그에서 유교는 한 걸음 비켜 나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를 보면 둘은 지향점, 혹은 착근한 데가 달라서였다고 본다. 물론 이것도 주자성리학 이전이라, 중국에서도 중당 무렵 한유와 이고 시대가 되면, 이 두 사람은 원리주의 유가 신봉자라, 정치는 물론이고 여타 생활 분야에서도 불교가 활개하는 모습을 용납치 아니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것이 결국 북송 남송 시대가 개막하면서 유교가 불교랑 한 판 뜨는 시대가 펼쳐진다. 

암튼, 성종은 역시 그 시대정신에 맞게 정치는 유교, 생활은 불교라는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성종이지만, 팔관회 폐지 같은 후대 유자들이 보기에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 말한 조치를 취하는데, 국고 낭비라는 시각 말고도 유교 성향도 밑바탕이 깔렸다고 본다. 

그렇게 성종이 폐지한 팔관회가 화려하게 부활한다. 언제? 바로 고려거란전쟁 주무대가 되는 고려 현종시대에 재개한다. 

것도 희한하게도 고려 침공이 결정된 상황에서 말이다. 

현종 원년(1010년), 강조의 변을 구실 삼아 거란은 덕지덕지 여기저기서 군사를 긁어 모아 언필칭 40만을 일컬으며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는 종주국을 자처했으니, 제후국 고려를 치는 데는 명분이 필요했고, 또 무엇보다 그 명분에는 절차를 따라야 했다. 이 절차에 따라 거란은 너희를 칠 것이라고 공식 통보한다.

요새 같으면 있기 힘든 일이다. 느닷없이 쳐야지 저런 예의 다 차리고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좀 웃긴 연등회. 이게 동아시아 용인가? 드래곤이지?

 
그럼에도 거란이 저리한 까닭은 우리가 너희의 종주국이다는 개똥폼이며, 나아가 우리가 침공하기 전에 그것을 무마할 만한 충분한 대책을 갖고 와라! 이걸 요구한 것이다. 그걸 보고 실제 침공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를 막고자 고려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외교전을 펼쳤다. 하지만 실패했다. 거란 성종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만족할 만한 수습 방안을 고려가 내는 데 실패한 까닭이다. 드라마에서는 거란 성종이 수렴청정한 엄마가 죽으면서 비로소 친정 체제를 개시했고, 그것을 만천하게 공포할 만한 수단으로 대규모 정벌과 그에 따른 승리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리한 것으로 그렸는데, 이는 틀림없이 관련 연구성과를 인용한 결과로 보는데, 아무튼 탁월한 역사해석이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원년(1010년) 11월 조를 보면, 마침내 거란이 장군將軍 소응蕭凝을 고려에 보내서는 너희를 황제가 친히 정벌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한다. 

이 일은 비밀에 부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당연히 조정이 벌집 쑤신 듯 했을 터인데, 이 와중에 같은 달 현종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같은 절요 대목이다. 

팔관회八關會를 부활하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어해 연악宴樂을 관람하셨다. 과거에 성종成宗은 잡다한 기예가 불경하고 번잡하다는 이유로 모두 폐지하고, 다만 당일에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행향行香하고는 돌아와 구정毬庭에 이르러서 문무 관리들의 조하朝賀만을 받았을 따름이다. 폐지한 지 거의 30년 되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정당문학政堂文學 최항崔沆이 요청하므로 부활했다.

위봉루란 개경 왕궁 정문이라, 간단히 견주자면 경복궁의 광화문이다. 사람들 스포트라이트가 모이는 이곳을 지목해 궁궐 앞마당에다가 주연장을 마련하고는 팔관회가 부활했음을 대외로 공포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몇 가지 측면에서 나는 본다. 첫째 카니벌에 대한 욕망을 수용한 것이다. 팔관회는 간단히 말해 카니벌이다. 먹고 마시고 개판 치는 페스티벌이다.

이런 자리를 30년이나 억눌렀으니, 이른바 민중이 욕망을 분출할 데가 마뜩잖았다. 그 욕망을 수용함으로써 그 욕망을 드러낼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저러한 대규모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왕이 친림했다. 이는 곧 이런 카니벌이 왕이 베푼 시혜임을 극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그 자리서 오가는 함성은 뻔하다. 대왕폐하 만세! 딱 이거다. 이를 정당문학 최항은 직감으로 알았다. 

더구나 쿠데타로 엎혀서 왕이 된 현종으로서는 대중을 끌어들여야 했다. 

다음으로 그 시점이다. 대대적인 내침을 앞두고, 더구나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저 시점에 조정으로서는 대중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 힘을 분출하는 자리로 팔관회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전쟁에서는 어찌 구현됐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더구나 초반에 개박살이 났으므로, 직접 효과는 없다 볼 수 있지만,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겠는가?

고려시대 군주는 구중심처에 쳐박히고 저런 페스티벌의 페자도 모르는 조선시대 임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조선의 군주들에 견주어 훨씬 대중과 가까이 가고자 했다. 걸핏하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니 이는 서구의 군주들과 비슷했다.

그런 면모를 더욱 극적으로 보인 인물이 훗날 의종이다. 

또 하나, 눈앞에 닥친 위기를 딴 데로 돌려야 했다는 현실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어딘가로 대중의 관심을 돌려야했다. 이를 위해서는 팔관회 만한 카니발은 없었다. 

이런 점들이 고려되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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