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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김학순 할머니 고백이 만든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by taeshik.kim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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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14 수송동 수요집회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이 만든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종합)

송고시간 | 2019-08-14 16:06

여성가족부, 작년 이어 두번째 정부차원 행사 개최

피해 할머니 유족이 보내는 편지 낭독, 전국서 다채로운 기념행사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 주한일본대사관을 지척에 둔 종로구 수송동 우리 공장 안팎은 하루 죙일 마침 수요집회가 겹쳐 난리통에 가까운 번잡이 빚어졌다. 


이 무더위에도 주변 도로는 온통 사람으로 북적였고, 덕분에 에어컨 빵빵한 우리 공장 1층 로비도 집회 참여자들로 북적였다. 


정부 차원에서 이날을 기념으로 삼아,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을 치르기는 작년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다. 그렇다면 하필 이날인가?


이날은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스스로 고백한 역사적인 날이다. 그의 고백을 필두로 해서 봇물 터지듯 그간 숨겨야 한 과거의 고백록이 쏟아져 나왔으니, 할머니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새삼스레 우리 공장 DB를 돌려 1991년 8월 14일자 김학순 할머니 고백록을 증언하는 기사를 찾아봤다. 당시 시대상도 전달하고자 그대로 전재해 본다.  


1991. 8. 14 김학순 할머니. 연합DB 


1991.08.14 19:34:12

정신대 첫 증인 김학순할머니

중국 철벽진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


(서울=聯合) 金鎭亨기자 = "내 나라 잃어버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 가슴이  떨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제 치하 정신대로 끌려 갔었던 金學順할머니(68)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한 맺힌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면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회장 尹貞玉)의 주선으로 자신이 정신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기자회견이 14일 처음으로 열려 지난 46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정신대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정신대의 산증인인 金씨는 24년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가 14세때  평양에서 양녀로 들어가게 됐다.


그후 양부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41년 일본 군대의 위안소에 끌려가게 됐다.


1991. 8. 14 김학순 할머니. 연합DB 


金씨는 "거기에는 한국인 여성이 5명이었는데 내가 17세로 제일 어렸고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22세였다"고 밝히면서 "군인들은 사흘에 한번씩 휴가를 나오는데 그 때에는 한 위안부가 3-4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고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전했다. 金씨는 3백명 가량 되는 부대에 위안부로 있었으며 위안소는  군대앞  중국집에 설치됐다.


위안소 안에는 칸막이를 설치해 5개의 방으로 만들었고 명령에 따라 무조건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군인들은 당시 1원50전씩 내고 위안부를 찾았지만 위안부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었고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군에서 주는 쌀과 부식으로 끼니를 떼우고 지냈다. 더욱이 감시하는 여자가 있는데다 중국 최전방지역이어서 탈출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다는 것.


다행히 김씨는 위안부 생활 3개월여만에 한국상인을 만나 그와 함께 밤길에  위안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그 상인과 가정을 꾸리고 해방될 때까지 중국에서 지냈다.


해방후 남편과 아들, 딸 4식구가 한국에 돌아왔지만 곧바로 홍역으로 딸을 잃고 남편도 사고로 잃은 다음 장사를 하면서 지내다가 아들도 동해안에서  사고로  잃고 혼자서 지내왔다.


서울 종로구 충신동 4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일당 1만원의 취로사업에 나가면서 근근이 살고 있는 金씨는 "일본깃발만 봐도 지난 한스런 세월때문에 가슴이  떨린다"면서 "눈 감기 전에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끝)


시대적 한계랄까 하는 대목이 적지 않으니, 당시만 해도 정신대=위안부로 통용하던 시대라, 하긴 그런 인식에 따라 이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고자 출범한 시민단체 이름부터 벌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약칭 정대협이었으니, 간평하자면 정신대는 강제동원 양태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사건은 내가 이 공장에 입사하기 직전이니, 작성자 김진형 기자는 현재 우리 공장 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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