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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꼬이면 고민없이 때려 엎는 일을 혁명이라 부른다

by 초야잠필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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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난맥상의 하나가 바로 토지문제와 금전문제이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마찬가지라서  먹고사는 문제 관련해서 꼬이기도 하는 법이다. 

이걸 어떻게든 돌아가는 모양을 만들어 놓으려는 노력을 해야지 

안 돌아간다고 그걸 때려 엎어 놓고는 혁명과 위민이라고 치장하는 과정이 한국사에는 여러 번 보였다. 

예를 들어 여말선초의 사전-. 

이건 당시 한국사만 이런게 아니고 중국사, 일본사 모두 소위 말하는 균전제-율령제가 붕괴하고 난 뒤 일어나는 사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문제는 

한국, 일본, 중국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겪던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유독 한국만 이걸 때려 엎어 사전을 싹 다 밀어버리고 공전 일색으로 만들어 놓고는 이걸 혁명이라고 포장했다. 

솔직히 여말선초의 사전개혁을 그걸 "혁명"이나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사전이 문제라면 그걸 어떻게든 달래고 고치고 해서 끌고 나갈 생각을 해야지 

복잡하고 생각하기 귀찮다고 어떻게 있는 사전 문서를 다 태워버리고 과전법을 출범시키냐 이거다.

이런 비슷한 예는 또 있다. 

중국에서는 기근이 들면, 곡식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에게 곡식을 내놓게 하기 위해 국가에서 여러가지 대책을 마련했는데 그 중 주목할 것의 하나가

"가격을 싸게 만들어 있는 이들이 곡식을 내놓지 않게 하지 말라"

는 것이다. 

빈민에게 이롭게 한다고 곡식 가격을 너무 내려 놓으면 있는 이들이 내놓지 않으니 가격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것이 곡식을 오히려 더 내놓게 하기 쉽다는 뜻이겠다. 

송대에 만들어진 이 제도가 우리나라도 수입이 되어 조선시대에 많이 회자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이게 안됐다. 

애초에 가격 보장이고 나발도 없고 급하다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뺏아 곡식을 풀게 하는 방식이 많았고, 

이렇게 뺏다시피 해서 가져간 곡식은 도대체 나중에 보상이나 제대로 해줬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보상은 해줬을 리도 없고 공공의 이익이라는 미명 하에 입을 씻었을 것이다. 

이런 게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해방 직후 북한에서 이루어진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인데 

그 결과는 지금 이북의 경제사정을 보면 안다. 

이걸 아직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한국사에서 과전법도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고 유구한 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제 가격도 안 쳐주면서 내놓는 위민정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 백면서생들의 넋두리라 하겠고, 조선시대가 무서운 건 그 백면서생의 넋두리가 실제로 먹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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