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집 딸내미 이야기]
꽃병집 딸내미. 어릴적 나를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동네에서 난 꽃병집 딸내미라고 불렸다.
(오빠가 있었으나, 이상하게 오빠는 꽃병집 아들로 불리지 않았다.)
아빠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서 태어났다. 당성 아래 제부도와 가까운 동네다.
3남2녀 중 장남인 아빠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으나 집안이 어려워 학교는 오래 다니지 못하셨고,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으며 어찌어찌해서 ‘꽃병’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것 같다.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있었던 아빠는 곧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아빠가 만들던 꽃병은 ‘백골’이라고 하는 플라스틱으로 기본 틀을 찍어내고 그 위에 옻칠을 하고 여러 도안으로 자개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처음 정릉 아리랑고개 근처에서 공장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너무 어릴 때라 이 때의 기억은 잘 없다. 내가 5살 무렵 삼양동으로 이사와서 10여년간 계속 공장을 운영했고 내 기억은 이 삼양동 공장이 전부다. 집은 단칸방이고 공장이 그 옆에 붙어 있었으며, 일하던 삼촌들도 3~4명 있었던 것 같다. 집과 공장에는 봉황, 용, 호랑이 등이 그려진 도안이랑 무지개색 자개들, 플라스틱 백골 등이 널려 있었다.
우리 공장 이름은 ‘대왕공예사’였다. 아빠는 평택(송탄), 왕십리, 남대문 시장 등으로 물건을 팔았고, 80~90년대 초반까지는 장사가 꽤 잘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서 외국인들에게 기념품으로 많이 팔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중1 무렵인 93~94년쯤부터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꽃병이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공장도 닫고 일하던 삼촌들도 다 그만뒀다. 아빠도 더 이상 꽃병을 만들지 않았다. 간혹 주문이 들어오면 그동안 만들어 놓은 물건들을 납품하곤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서울시 유제욱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당시의 물건들이 있는지 다시 찾아봐달라고 했더니 아쉽게도 집을 이사하고 정리하면서 다 버렸다고 한다. 커다란 봉황 두 마리가 있던 꽃병도 얼마 전 마지막으로 내버렸다고.... 그래도 혹시나 하고 사진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찾아서 몇 장 보내주셨다. 당시에는 카탈로그 같은 걸 만들지 않고 이렇게 집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서 물건을 홍보했다고 했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더 이상 아빠는 ‘꽃병집 사장’으로, 나도 ‘꽃병집 딸내미’로 불리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 꽃병집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어 이렇게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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