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구 광교산 자락, 이곳은 명당이었나보다. 여러 차례나 묘를 썼었다.
가경7년(1802년)명 지석이 나온 최기령의 묘는 정부인 천녕현씨와 증정부인 정읍이씨와의 합장묘다. 최기령(1737~1802)은 집안대대로 역관을 지냈는데 왜학을 전공했다. 지석은 두장인데 한장은 벼루를 재활용한 듯 하다.
여산군수 이공의 묘는 정부인 용인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묘표에 의하면 순치4년(1647년)에 만들어졌으나, 토층 상황으로 보아 최기령의 묘 조성 이후에 현위치로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좌우의 감실에서 백자 명기가 각각 17점, 20점이 출토되었는데 여자측 명기가 유색이나 굽의 상태로 보아 좀 더 고급품이다. 조사단에서는 17세기 관요 생산품으로 추정했다.
새로 조성된 체육공원 안에 있는 무덤이라 민원이 많았다고 한다. 근처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분묘 관련 석물들을 보고 기분나쁘다고 했나보다. 저분들이야 말로 몇 백년 전에 용인에서 살았던 분들인데, 보기싫은 혐오대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지금은 묘를 관리하는 후손도 없고...그나마 발굴조사로 겨우 존재를 확인하게 됐으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 자문회의 결과 문인석, 묘표석, 혼유석, 상석 등의 석물은 용인시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기로 했다. 내년에 박물관 야외전시장을 개편해서 자리를 잡아준다고 하니 다행이다.
덧붙여, 용인지역 내 유물 수집과 보관, 연구, 전시할 수 있도록 박물관을 키워야 하는데, 10년째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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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주인공 최기령崔麒齡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왜학, 곧 일본어 전문 역관이며 《인어대방隣語大方》 저자이기도 하다. 《역과방목譯科榜目》에 의하면, 최기령은 자字가 위래爲來이고, 계축(1733)생으로 본관은 무주茂朱다. 아버지는 역관 수명壽溟이고, 큰형 학령은 왜학교회숭록영부지추倭學敎誨崇祿永付知樞, 작은형 봉령鳳齡은 왜학교회숭록지추倭學敎誨崇祿知樞인 역관 집안 출신이다.
《인어대방》은 1790년(정조 14)에 왜학당상역관倭學堂上譯官 최기령이 편찬한 일본어 학습서로, 일본어를 흘림체[草體]로 쓰고, 한 자 낮추어 한글과 한자를 섞어 해자楷字로 썼으며, 사역원에서 사용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일성록日省錄》에 보이는 1790년 7월 19일 사역원에서 올린 계啓에 의하면, “몽왜蒙倭 양학兩學의 서적이 미비하여 학습에 어려움이 있은 지 오래더니, 연전에 왜학당상역관 최기령이 《인어대방》 5책을 구입하여 학어자學語者의 지남指南이 되었는데, 그의 주선으로 새로 펴냈다.〔開板成書〕”라고 했다. 이로 보아 그의 나이 57세 때 펴냈다고 추정된다.
10권 5책 목판본이며 서발序跋과 간기刊記가 없고, 총 236장에 510종 이야기를 수록했다. 국내에는 규장각도서관 소장본이 현존유일본인데, 일본에도 규장각본과는 다른 《인어대방》이 있어, 한국어 학습서로 쓰였다.
그 첫째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이 소장한 1859년 사본인 4권 2책 《인어대방》이고, 둘째는 쓰시마[對馬島] 사람 우라세[浦瀨裕]가 교정증보校訂增補해 1882년 일본 외무성에서 출판한 9권 3책의 《정정인어대방訂正隣語大方》과 그 재간본이다.
교토대학본은 신무라 이즈루[新村出]가 가고시마[鹿兒島]의 나와시로가와[苗代川]에 거주하는 한국인 후예한테서 구입한 필사본 2책으로, 각각 26장, 28장으로 되어 있다. 2권 끝에는 “주박평관 안정육년말 무신월사야(主朴平寬 安政六年(1859년)末 無神月(10월)寫也)”라고 씌었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글을 주문으로 삼고 그 오른쪽에는 가다카나와 한자를 섞은 일본어를 달아놓았다.
외무성본은 9권을 천天·지地·인人 3책으로 나누고, 첫머리마다 “대마주포뢰유교정증보 방주보박번승인쇄(對馬州浦瀨裕校正增補 防州寶迫繁勝印刷)”라고 했다. 장수는 천 33장, 지 26장, 인 36장이다. 한글을 주문으로 하고, 왼쪽에는 필요한 한자를, 오른쪽에는 일본어를 달아놓았다.
권두에는 “예전에 쓰시마 사람들이 공사사무公私事務로 조선인과 대화한 것과 왕복서간往復書簡을 모은 것으로, 언제 누가 엮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후쿠야마[福山] 모씨某氏라고 구전되어 있기도 한다.”라는 서언緖言이 있다.
이 책도 《교린수지交隣須知》와 마찬가지로, 옛 말투로 편지나 대화에 불편한 점이 있어 경성의 학사를 불러 근세의 어법으로 수정했다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각 권 첫머리에 제목이 없다. 한데 규장각본 권1의 “우리게 첩해신어(捷解新語)라 ᄒᆞ고 일본말 ᄇᆡ호ᄂᆞᆫ ᄎᆡᆨ이 읻ᄉᆞᆸ더니……”라는 내용이 외무성본 권2에 그대로 든 점과 기타 내용으로 보아 조선에서 발상發想하여 편찬되고, 일본에서는 거꾸로 한국어학습에 이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규장각도서 소장본을 교토대학 국어국문학회京都大學國語國文學會와 태학사에서 1988년 영인 간행했다.
본문은 일상적인 교훈으로부터 상담商談에 이르기까지 길고 짧은 이야기가 한 장에 평균 2개씩 들어 있다. 그리고 구개음화한 표기가 비어두, 어두에서 모두 나타나며, 어두 된소리는 ㅅ계 합용병서와 각자병서(ㄲ, ㄸ, ㅆ)가 모두 쓰인다.
모음과 모음 사이 유기음은 연철해 표기한 일도 있고, 중철하거나 재음소적 표기를 택한 것도 존재하여 세 가지 표기법을 모두 확인한다.
당대 문헌에서 종성 ‘ㅅ’과 ‘ㄷ’을 대부분 ‘ㅅ’으로 통일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에는 반대로 ‘ㄷ’으로 표기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당시 왜학서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 밖에도 주격조사 ‘-가’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공동격 조사가 모음 아래에서도 ‘-와’가 아닌 ‘-과’로 표기된 예가 ‘ᄌᆡ조과’, ‘그과’에서 보인다.(이상 인어대방에 대한 설명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정리한 것이나, 최근 새로운 연구성과가 있는 모양이라, 그걸 입수하는 대로 분석 정리해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요점만 미리 말한다면 인어대방은 최기령 작이 아니라 그 간행에 관여한 인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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