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승전지인 처인성은 흙으로 쌓은 소규모 토성으로 당시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주성(主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곡(衙谷)이라는 마을 이름도 처인현의 관아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처인성에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史』 列傳16, 金允侯傳
"김윤후는 본래 백현원이란 절에 머무르는 승려였다. 1232년 몽골군이 오자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는데, 처인부곡민과 함께 몽골군의 장수 살리타(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였다. 왕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 벼슬을 주었으나 김윤후는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며 말하기를 “싸울 때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헛되게 많은 상을 받겠는가”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아니하므로 이에 섭랑장(攝郞將)의 벼슬로 고쳐주었다."
<2016년의 처인성 : 주변의 논밭 사이로 토성인듯 아닌듯, 언덕인듯 아닌듯 자리하고 있다.>
용인 처인성,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인"은 "용구현"과 "처인현"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지명으로, 처인성 승리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말하자면 처인성은 용인이란 지명 탄생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처인성은 낮은 토성이다. 너른 들판 가운데 홀로 낮은 구릉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처인성을 찾는 사람들은 처인성을 코앞에 두고도 어딘지 찾지 못하기도 한다.
용인의 지역 정체성을 얘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처인성이건만, 그동안 용인시에서는 이렇다할 정비도, 발굴도 진행하지 않았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지나온 시간을 탓하기 보다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는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 추진력, 예산, 사람 등 모든 요소가 갖춰지고 적절한 타이밍으로 굴러가야 이뤄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도 사업이 목표한대로 잘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변수는 늘 발생한다. 그래도 제발 사람을 믿고 끝까지 가줬으면 한다.
2015년부터 처인성 정비와 활용을 목적으로, 처인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토지매입, 탐방로 정비, 수목정비, 주차장 등 처인성 역사공원 조성과 처인성의 역사와 콘텐츠를 홍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교육관 건립이 주된 사업이다. 예정대로라면 2020년 상반기 내에 주변 공원화 사업은 완료될 예정이고, 교육관은 2021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처인성 입구에 세운 처인성 아트월, 아직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
<처인성 탐방로 주변으로 조경공사가 한창이다. 저 멀리 아곡지구 한숲시티 아파트가 보인다. 3~4년 사이 처인성 주변은 많이 도시화되었다.>
다른 지자체들도 마찬가지지만, 선거철만 되면, 출마를 위한 사람들이 문화재 하나 쯤은 언급하기 마련이다. 처인성도 작년에 모 국회의원 덕분에 문화재청장님도 다녀가시고, 국회에서 학술토론회도 열렸으며, 시굴조사 예산까지 만들어졌다.
그 국회의원은 당을 바꿔 용인이 아닌 노원쪽에 출마했고, 낙선했다. 어쨋든 이 사람 덕분에 처인성 내부 시굴조사를 무사히 진행하게 되었으니, 홀연히 떠나셨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인성을 위해 작은 선물 하나 주고 가셨다고 생각한다.
<2019년 7월, 처음으로 처인성에 문화재청장님이 방문하셨다. 왼쪽 이모 국회의원, 지역구를 옮기고 홀연히 용인을 떠났다.>
처인성 시굴조사는 99년에 실시된 이후, 2018년 처인성 주변 2차 시굴조사를 진행했었고, 이번 조사는 성 내부를 대상으로 3차 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번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명문와가 나왔다. 정말 처인성은 어떤 성이었을까.
<3차 시굴조사에서 처음 확인된 명문기와이다.(사진은 좌우 반전) 정말 처인성은 어떤 성이었을까.>
이제 정말 처인성의 초축부터 대몽항쟁기, 조선전기 군창 운영 시기 등 처인성의 전반적인 운영과 구조, 시설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오려나보다. 계획대로 잘 진행된다면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발굴조사를 추진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인성 3차 시굴조사 자문회의 중, 날씨가 매우 좋았다.>
이제 겨우 예전의 촌티나는 모습을 벗고 있는 처인성이다. 오늘 보니 불과 몇 달 전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처인성의 변신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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