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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꿩 먹고 알 먹은 소수서원, 공사하다 얻은 구리 팔아 장서 채우고(1)

by taeshik.kim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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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경북 소백산맥 기슭 영주 땅 유서 깊은 유교 예제禮制 건축물은 본래 이름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이 한반도에 성리학을 본격 도입한 고려말 학자 안향安珦이 머물며 제자를 길러내던 데라 해서 그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사당에서 역사가 비롯한다.

건립 이듬해 사당 기능 외에도 학교 기능을 가미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이름을 고치고, 다시 명종 5년(1550)에 이르러 이곳 군수를 하던 퇴계 이황이 왕한테 왕께서 직접 이름 하나 내려주소서 해서 ‘소수서원’이라 이름을 받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그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이 시작한다. 

이 약사를 보면 백운동서원은 창건에서 사액 서원이 되기까지 역사가 얼마 되지 아니하고, 나아가 그 시기가 퇴계가 한창 안동 지역 사립학교 이사장으로 이름을 중앙까지 떨치던 무렵이며, 그런 까닭에 그 창건은 물론이요 실상의 중건에 이르기까지 퇴계가 그 과정을 직접 목도하거나 지휘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당색으로는 남인이라, 그 남인 남상인 퇴계 이황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런 그가 퇴계 사후 대략 140년이나 지난 숙종 35년, 1709년, 당시 29살 한창 나이에 퇴계 본향인 도산서원을 필두로 그의 체취가 남은 인근 백운동서원도 방문하고는 그 기행문을 남겼으니, 이는 《성호전집》 제53권 기記에 수록됐다. 

 

서울 도봉서원 터에서 쏟아져 나온 그 이전 영국사 관련 유물들

 

 

그 백운동서원 방문기〔訪白雲洞記〕를 보면 이 서원이 소장한 퇴계 유묵遺墨 1첩을 열람했다고 하면서 개중 한 편을 발췌 인용했으니, 서원 일로 퇴계가 방백方伯 심통원沈通源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가 아마도 《퇴계전서》에 수록됐을 듯한데,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퇴계가 서원 이름을 임금이 내려줄 것을 직속 상관인 경상도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청하는 내용이었으리라. 

내가 이 편지를 직접 살핀 것은 아니로대, 성호가 인용한 한 대목에 의하면

“백운동서원은 전 군수 주세붕이 창건한 것입니다. 죽계의 물이 소백산小白山 아래에서 발원하여 옛 순흥부 안으로 흘러 지나가는데, 이곳은 실로 선정 안 문성공이 옛날에 살던 곳입니다. 골짝이 그윽하고 깊으며 구름 낀 산골이 아늑합니다.”

하고는 이어

“땅을 파다가 묻혀 있던 구리를 얻어 경·사·자·집經史子集 수백 권을 사 와서 소장해 두었습니다.” 

라 한다. 

이것이 퇴계가 서원을 중창할 무렵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주세붕이 창건할 때 있었던 일인지는 저 인용문만으로는 단안하기 힘들다. 개중 어느 시기건 두 시기는 불과 1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아니하므로, 아무튼 백운동서원 초창기에 저런 일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1849년, 헌종 15년 순흥도호부 사족 안정구安廷球(1803~1863) 찬 사찬 읍지인 《재향지梓鄕誌》 중 <순흥지順興誌>에 이르기를 

숙수사宿水寺 : 영귀산靈龜山 아래에 있었다. 숙수루宿水樓가 있었으니, 바로 백운서원白雲書院을 세운 곳이다. 주신재周愼齋(주세붕)가 서원을 창건할 때 터를 닦으면서 구리 약간 근을 출토하여 그 값으로 서적을 구입하여 소장하였다고 한다.

로 한 것으로 보아, 이 일은 주세붕 창건 시에 있었던 일임을 본다. 

 

도동서원 터 출토 영국사 금강저

 

그렇다면 땅을 파다가 구리를 얻어 그것을 판 돈으로 책 수백 권을 샀단 말은 무슨 뜻인가?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자리는 익히 알려졌듯이 숙수사宿水寺 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서원 이전에 이곳이 절이 있었음은 현재도 서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남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웅변한다.

이 숙수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고적 조에 이르기를 숙수사宿水寺를 들면서 이르기를 "소백산小白山에 있다[宿水寺。在小白山下。]"고 한 점이 영 께름칙해서, 이걸로만 보면,  《신증》 찬진 때까지 살아있었음을 추찰한다. 왜냐면, 이미 없어지고 터만 남은 경우에 《승람》은 그런 기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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