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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온실溫室, 비닐하우스 인공 재배가 조선왕조 발명품이라는 개소리에 대하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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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資治通鑑 권 제49, 한기漢紀 41, 후한 효상황제孝殤皇帝 영초永初 6년 임자壬子(서기 112)에 이르기를 

春, 正月甲寅, 詔曰:“凡供薦新味, 多非其節, 或郁養强孰, 或穿掘萌牙, 味無所至而夭折生長, 豈所以順時育物乎! 《傳》曰:‘非其時不食.’自今當奉祠陵廟及給御者, 皆須時乃上.”凡所省二十三種.

“무릇 새로운 맞을 바친다 하지만 대부분 그 절기에 맞지 않아 때로는 토지를 일부러 뜨겁게 해서 억지로 익게 하거나 때로는 땅을 파서 일찍 발아시키기에 제 맛이 나지 않고 제대로 생장하지 못하니, 어째 때에 맞춰 식물을 길렀다 하겠는가? 전傳(논어 향당鄕黨 편)에 이르기를 ‘때에 맞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다’ 했으니 지금부터는 사당이나 능묘에 제물로 올리는 것과 황실에서 올리는 것은 모두 제철에 나는 음식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무릇 생략한 것이 23종이었다.
 
한서漢書 권 제89 순리전循吏傳이 채록한 소신신召信臣 열전에 이르기를 

경녕竟寧 연간(BC 33)에 (지방관에서 중앙 조정에) 불려들어가 소부少府가 되어 구경九卿에 들어 주청하기를, 상림上林을 비롯한 여러 먼 궁관宮館은 황제가 행차는 일이 드문 경우는 다시 수리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하고, 또 주청하기를 악부樂府의 배우 숫자를 줄이며 아울러 궁관宮館의 병노兵弩 집기 제반은 절반으로 줄이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태관太官이 정원에 씨를 뿌려 겨울에 파를 비롯한 채소를 나게 하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밤낮으로 따듯하게 불을 때서 따뜻한 기온으로 싹이 나길 기다리지만 저 신신信臣이 생각하기에 이들은 모조리 시절에 맞는 물건이 아니며 사람을 상하게 하니 바쳐서 공양하기에는 적절치 아니하니, 이런 법식에 맞지 않은 물건들은 모두 혁파하시라 하니, 이렇게 해서 비용 수천 만금을 절약했다”

竟寧中,徵為少府,列於九卿,奏請上林諸離遠宮館稀幸御者,勿復繕治共張,又奏省樂府黃門倡優諸戲,及宮館兵弩什器減過泰半。太官園種冬生蔥韭菜茹,覆以屋廡,晝夜然蘊火,待溫氣乃生,信臣以為此皆不時之物,有傷於人,不宜以奉供養,及它非法食物,悉奏罷,省費歲數千萬。
 

이로 보아 온실을 통한 인공재배, 곧 비닐하우스 식물 재배는 연원이 아주 오래되어 중국사의 경우 적어도 한漢나라 시대 이전에 있었음을 본다. 

온실이 조선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호도하는 글을 많이 보는데, 웃기는 소리다. 

조선시대 온실 재배 근거로 흔히 아래와 같은 흔적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해 들거니와 

성종 2년 신묘(1471) 11월 21일(기미)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올리니, 전교傳敎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 20년 무오(1438) 5월 27일(경술)
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중략) “신이 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듣사온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造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이와 더불어 강희안(1417∼1464) 원예록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보이는 토우土宇를 보도자료로 들기도 하며, 아울러  

조선 순조 30년(1830) 이전에 완성했음이 확실한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인 동궐도東闕圖에 그 흔적이 보임을 대서특필하기도 한다. 

비교가 없으면 그 역사는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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