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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나라를 비운 왕과 태자, 감국監國하는 김유신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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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본기엔 대 고구려 정벌 전쟁에 김유신이 풍질로 직접 참가치는 못했다 하지만 같은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3 김유신 하에는 그와는 언뜻 다른 듯한 사정이 거론됐으니, 병이 아니라 문무왕의 뜻에 따라 수도에 머물렀다 한다.

간단히 추리자면 나까지 수도를 비웠다가 수도에 무슨 일이 생기는 비상사태에 대처할 인물로는 김유신 밖에 없으니 그래서 문무왕이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감국의 역할을 김유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술, 그러니깐 출정에 앞서 김유신을 대신하여 총사령관 역할을 대신할 장군 김흠순과 김인문을 불러 문무왕이 하는 다음 언급에서 명확하다.

“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의 땅으로 갔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하니 유신을 이곳에 남겨 나라를 지키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장성長城과 같아 아무 근심이 없으리라.”

이로 보아 문무왕이 자신이 수도를 비울 때 자신을 대신할 감국으로는 김유신 김흠순 김인문 세 사람을 후보로 점찍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이 출정했더라면 틀림없이 흠순이나 인문 두 사람 중 한명이 남아 수도방위 사령관을 했을 것이다.

혹자는 김유신이 출정하지 못한 계기가 본기와 열전이 다르다고 하면서 둘 중에서도 풍질을 거론한 본기 쪽 기록이 옳다고 한다. 이런 이해가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루는 실정이거니와 이는 언어도단과 같은 주장이다. 두 기록은 상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출정에 앞서 왜 총사령관 김유신은 빠진 채 흠순과 인문이 불려갔겠는가? 김유신이 몸져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궐할 수 없었고 그래서 두 사람만 들어간 것이다.

김유신의 와병은 문무왕에겐 누구를 감국으로 삼아야 하는지 하는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준 천우신조였다. 김유신을 믿고 문무왕은 뒷문 걱정하지 않고 전쟁터로 향한 것이다. 보통 이런 때 감국은 태자가 하지만 태자 정명은 이 당시 구상유취였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김유신의 공로는 무엇인가? 제1등이다. 왕이 장기간 비운 수도를 철통같이 방비하고 항용 이런 기회를 맞아 움틀댈지도 모를 반란의 기운을 아주 싹부터 잘랐으니 이런 공로를 어디다 비기겠는가?

 

김유신의 유언은?



전쟁이 마침내 신라의 승리로 귀결하고 환도하는 길에 남한주에 다달은 문무왕은 대대적인 포상을 실시한다. 이런 중차대한 때를 맞이해 문무왕이 하는 말이다. 김유신 전에 보인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백제 성왕)이 고리산古利山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각간 무력武力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쳐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와 양잠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돌보는 데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여야 옳겠는가?”

여러 신하가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참으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전에 오를 때도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도 각각 직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김유신은 일등공신이다. 그는 계림으로 돌아가서 논공행상을 하면 틀림없이 출정도 하지 못한 자신이 이런 과분한 포상을 거절하리란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그리하여 환도하기 전 지금의 서울에서 기습적으로 김유신에 대한 포상을 공포해버린 것이라고 나는 본다.

79세..이제는 더는 이승에서 버틸 힘을 상실하고 몸져 누운 유신을 문무왕이 문병하자 유신이 말한다.

“신은 어리석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고, 변치 않고 임무를 맡겨 주셨기에, 대왕의 밝으심에 의지하여 하찮은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옵건대 예로부터 제왕의 자리를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이루어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을 편안하게 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대대로 왕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나는 이 장면을 삼국사기의 백미로 꼽는다. 나는 이것이 한국고대사 일천년래 화룡점정이라 본다.

이것이 단재가 민족배반자라는 딱지를 붙여 부관하고 참시하고자 한 김유신의 진면목이다. (2016.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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