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풍질로 주저앉은 총사령관 김유신

by taeshik.kim 2023. 6. 9.
반응형

감국監國이란 글자 그대로는 나라를 돌본다는 뜻이니, 이는 비상시에 군주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을 대리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은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나 태자가 하지만, 그가 어리거나 병들거나 했을 적에는 중신(重臣) 중에서 명망이 높인 이를 골라 맡기기도 한다.

명망이 높아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비상사태에 반란을 억누를 수 있는 권위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이런 감국이 흔했을 것이나, 역사에서 확인하는 실례는 거의 없으니, 이는 기록의 소략함에서 기인한다. 그런 가운데서 역시나 김유신이 감국을 한 일을 발견할 수 있으니, 668년 고구려 정벌 전쟁에서 그가 수도 계림(혹은 금성이라도 했다)에 남아 감국을 했음이 확실하다.

문무왕 김법민은 아들을 늦게 본 듯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5년(서기 665) 조를 보면 이해 “가을 8월에 왕자 정명(政明)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다”고 하거니와, 이 김정명이 훗날의 신문왕이다. 이때 정명이 몇 살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통상 태자는 적자 중에서 장자를 임명하고, 정명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그가 이 무렵에 어렸을 것임을 추찰할 수 있겠다.

 

대사 앞두고 입원한 김유신



이로부터 불과 3년 뒤 신라는 당군과 합세해 대대적인 고구려 정벌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나당 연합군은 승리하니 고구려 700년 사직은 마침내 종말을 고한다.

이 전쟁에 대비한 신라 측 조치를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서기 668) 조 기록에서 훑어보면 먼저 이해 6월) 21일, 대 고구려 정벌군 진용을 갖췄으니 그 면모는 다음과 같다.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ㆍ흠순ㆍ천존ㆍ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ㆍ개원ㆍ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진순(陳純[혹은 ‘춘(春)’이라 한다.])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삼고, 이찬 품일과 잡찬 문훈ㆍ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삼고, 잡찬 군관ㆍ대아찬 도유(都儒)ㆍ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잡찬 숭신(崇信)ㆍ대아찬 문영ㆍ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宣光)과 아찬 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삼고, 아찬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이는 실상 계엄령 발포다. 이렇게 해서 제반 준비를 마치고는 그달 27일에는 문무왕이 계림을 출발해 평양성 공격에 나선 당나라 군영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같은 달 29일에는 여러 도 총관이 출발했다. 왜 총관들은 출발이 문무왕보다 늦었을까? 그것은 정벌군을 징발한 지역들이 모조리 소백산맥 이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무왕은 먼저 지금의 경주를 출발해 소백산맥을 넘는 동안, 다른 사령관들은 소백산맥 이북에서 행차를 기다렸다가 그에 맞추어 행군에 나선 것이다.

한데 출발 당일 문제가 생겼다. 문무왕을 호위해 경주를 같이 출발해야 할 총사령관 김유신이 풍병이 발병한 것이다. 이 대목 관련 문무왕본기 기술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풍병을 앓는 유신을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嬰留山)[영류산은 지금의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아래까지 진군하였다.(王以庾信病風留京 仁問等遇英公 進軍於嬰留山下)

이렇게 떠난 신라군은 9월 21일에는 마침내 당나라 군대와 합세해 평양성 공격에 나서 항복을 받아낸다. 문무왕은 전투 상황을 봐가며 느릿하게 후방에서 전진해 갔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문무왕본기 동년 9월조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 임금은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 related article *** 

 

나라를 비운 왕과 태자, 감국監國하는 김유신

 

 

나라를 비운 왕과 태자, 감국監國하는 김유신

문무왕본기엔 대 고구려 정벌 전쟁에 김유신이 풍질로 직접 참가치는 못했다 하지만 같은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3 김유신 하에는 그와는 언뜻 다른 듯한 사정이 거론됐으니, 병이 아니라 문무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