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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나라 안 으뜸가는 정자 망양정望洋亭에 올라 회고하는 역사 by 신정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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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망망하게 바라보는 정자 망양정望洋亭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도 있고, 기성면 망양리에도 있는데, 겸재 정선이나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4),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곳은 기성면의 망양정이다.

사라졌던 것을 새로 지은 망양정에서 지난날을 회고했다.

망양정은 원래 평해군 기성면 망양리 앞 모래사장 가에 있었다. 조선 세종 때 평해군수 채신보가 정자가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마을의 남쪽 현종산 기슭에 옮겨 세웠다.

조선시대 정국공신 채수蔡壽(1449~1515)는 ‘우리나라를 봉래 방장과 같은 산수 좋은 신선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관동이 제일이며 이곳의 누대를 백으로 헤아리지만 망양정이 으뜸.’이라고 극찬하였는데 이것은 망양정이 이름 그대로 바다를 전망하기 좋은 승지에 위치한 정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숙종은 강원도관찰사에게 관동팔경을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해서 두루 감상한 뒤에 망양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면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고 쓴 친필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려온 그림이 좋았던 덕분도 있지만 넓게 트인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그만큼 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1689년의 숙종 임금은 이곳을 친히 돌아보고 ‘뭇 봉우리 거듭거듭 서리서리 열리니 성낸 파도, 거친 물결 하늘에 불어온다. 이 바다 변해서 술이 된다면 어찌 단지 삼백 잔만 기울이겠는가.’라고 그의 호방한 뜻을 피력하였으며 제22대 정조 임금도 시를 읊어 그 경치를 찬양하였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이곳에 와서 시를 지었고, 조선초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평해 팔영’의 하나로 망양정을 꼽았으며 선조 때의 송강 정철은 망양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온 산을 깎아내어 천지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그 뒤를 이어 이곳에 왔던 이산해는 <망양정기>를 남겼다.

“내가 소싯적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글은 배워서 능할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책들을 구하여 읽었는데, 마음에 기억하고 입으로 독송하기를 오래 한 다음 시험 삼아 써보았더니 글은 비록 이루어졌으나 비루하여 보잘 것이 없었다.

이윽고 생각해보니, 글이란 기氣가 주가 되므로 기가 충실하지 못하고서 글을 잘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옛날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사해四海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여, 기에서 얻어 말로 나타내었던 까닭에 그 글이 소탕疏宕하고 기건奇健하여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나는 치우친 땅에 태어난 데다 그나마 나라 안의 기이한 경관도 다 보지 못하였으니, 글이 이처럼 조잡함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하겠다.

내가 영동으로 귀양 오는 길에 낙산을 지나면서 일출을 보고 임영臨瀛(강릉의 고호)을 지나면서 경포대와 한송정의 빼어난 경관을 바라보고, 소공대召公臺를 지나면서 아스라이 먼 울릉도의 자태를 바라봄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망양정에 올라,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깊어 그 크기가 밖이 없고, 그 넓이가 가이 없고, 그 깊이가 끝이 없음을 본 뒤에야, 비로소 평생의 장관을 유감없이 다하여 호호탕탕한 흉중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 느껴졌다.(중략)

아, 내가 미미한 일신으로 정자에 올라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나의 존재가 겨나 하루살이보다도 더 보잘 것이 없건만, 늘 푸른 하늘과 드넓은 땅, 아득한 바다와 수많은 만물이 각가지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가슴속으로 달려 들어와 나의 작용이 되지 않음이 없은즉, 그 또한 장엄하다 하겠다.



이에 한 호리병의 텁텁한 막걸리를 자작自酌해 마시다가 취해 창안蒼顔백발로 정자우이 쓰러져 누우면 천지가 일개 이부자리고이고 창해滄海가 일개 도랑이고, 고금古今이 일개 순간이라.

시비是非니 득실得失이니 영욕榮辱이니 희비喜悲니 하는 따위는 남김없이 융해되고 세척되어 저 홍몽鴻濛한 혼돈의 세계에서 조물주와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또한 통쾌하다 하겠다.“


망양정을 답사한 뒤에 쓴 이 기문에서 이 산해는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탄복할만한 글은, 책을 읽고 써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운 장관을 다 본 뒤에야 기가 충만해 쓸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서린 망양정은 중종 때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명하여 중수하였지만 오래되어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금의 근남면 산포리로 망양정이 옮겨 가고 지금은 그 자리에 비석만 남아 있다.

파도 소리가 그리움처럼 밀려오는 이곳 망양정에 올랐던 이산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망양정

바다를 낀 높은 전정자 전망이 탁 트여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긴 바람이 환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며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자, 이익이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명명한 이산해가 신산한 유배생활을 했던 정자 망양정 앞에는 길이 나고, 형태는 많이 변했는데, 파도는 쉬입없이 밀려오고 밀려 가고 있었다.

2023년 8월 7일

 

*** Editor's Note ***

 

이산해는 당대를 대표하는 명필이다. 그의 글씨는 당대 여러 금석문에서 산견하는데, 용인 조광조 비갈 역시 그의 글씨라, 이 글씨를 보면 찬탄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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