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3) 출세의 시작, 권적과 권정평 1

by 버블티짱 2023. 6. 29.
반응형

12세기에 들어서면 자기 능력을 바탕으로 개경에 올라 벼슬을 살던 안동권씨가 사료史料에 나타난다. 권적(權適, 1094~1146)과 권정평(權正平, 1085~1160)이라는 인물이 그들이다.

둘 다 묘지명이 현재 전해지고 있어 가계와 생애를 어느 정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모두 등장하는 권적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의종毅宗 2년(1148) 작성된 「권적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는 권적의 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공은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증조할아버지[曾王父]는 호장戶長 배융교위陪戎校尉인 휘諱 균한이고, 할아버지[大王父]는 정조正朝에 추봉된 휘 좌섬佐暹이며, 아버지[王父]는 검교태자첨사檢校大子詹事인 휘 덕여德輿이다.

권적의 증조부 권균한은 <성화보>에 권행의 증손이자 우일품별장右一品別將으로 등장한다. 우일품별장이란 고려시대 각 고을에 소속되어 노동을 담당하던 군대(향토예비군이라고 해야할까?) 우일품군右一品軍의 지휘관이다.

그리고 권균한의 아들 권좌섬은 추봉追封 정조라고 한 것을 보아 향직 16계 중 12번째인 정조正朝에도 오르지 못하고 죽은 하급 향리였다.

그의 아들, 곧 권균한의 손자이자 권적의 아버지 권덕여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개경에 올라온 것으로 여겨진다. 권덕여는 '검교태자첨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태자첨사는 고려시대 태자의 비서실 격이었던 첨사부詹事府의 사무를 총괄하는 정3품 관직이다. 그러나 여기에 '검교'자가 붙으면 실제 사무를 보지 않는 명예직 성격의 검교직檢校職이 된다. 이로 보아 권덕여는 아무래도 큰 출세는 하지 못한 듯하다.

(참고로 당대唐代에 권덕여(權德輿, 759~818)라는 이름을 가진 문인이 있었다. 권적의 아버지 이름이 이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권적의 선대가 가진 교양을 짐작해볼 만 하지 않을까. 김유신의 이름을 유신(庾信, 513~581)에서 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러나 권적 본인은 과거에 급제해 북송北宋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종3품 시국자좨주試國子祭酒 한림학사翰林學士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까지 올랐고, 문장력을 인정받아 국왕이 반포하는 글을 대신 짓는 지제고知制誥까지 겸하는 등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런 만큼 그의 묘지명 또한 고려 묘지명 중에서는 상당히 큰 편이다(특이하게도 이는 석관石棺의 뚜껑에 새겨 만들었다. 권적이 유자儒者였음에도 불교식 화장을 해 장사지냈다는 증거다).

권적 묘지명(1148년, 86x47cm, 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몇 년 전에 이 묘지명을 직접 들고 나르며 고화질 사진을 찍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데 이 묘지명을 보면 권적의 증조 권균한 이상의 조상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외조外祖도 없다.

시조始祖는 고사하고 사조四祖도 충분히 적지 않은 것이다.

왜?

 

*** previous article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2)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그 후손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답을 찾아서 (2)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그 후손

1. 세가와 지리지를 우선 살펴보자. 여기서 930년(고려 태조 13), 왕건과 견훤이 자웅을 겨뤘던 고창古昌 전투의 바로 다음 대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인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김선평金宣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