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1960년대까지 대학이 인위적으로 무리스러울 정도로 증설되고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을 증설해도, 농민이 소를 팔아 등록금을 낼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지 않겠는가?
당시 한국은 대학까지 무상교육 같은 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단계였다.
해방이후 한국 교육에는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시대 말까지 80퍼센트를 육박한 소작농이 급격히 줄어들고, 비록 영세할망정 자작농 숫자가 급증하였다.
농지개혁은 한국 교육사에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농지개혁으로 영세하나마 자작농이 급증하면서 우골탑을 쌓기 위해 "소를 팔 정도의 역량"이 되는 농민이 다수 생겨났다는 점이다. 이들이 자식들 미래를 위해 기꺼이 소를 내다 팔면서 비로소 한국 사립대학은 유지가 될 수 있었고, 이들은 한국의 근대화에 필수적이었던 "대학 졸업생"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둘째는, 농지개혁으로 코너에 몰린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으며 받은 보상금을 사립교육재단으로 돌릴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다. 이는 "지주들이 농지개혁 국면에서 편법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할수 있게 해 준" 것으로 폄하하는 글도 많이 보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어쨌건 농지개혁 당시 지주들의 재산이 당장 국가에 필요한 고급인력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투자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농지개혁 국면에서, 사립교육재단으로 전환을 시도하지 않은 지주들은 거의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실패하고 소멸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우골탑은,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의 "대학설립 드라이브"에 "농지개혁"이 맞물리며 이루어진 성과라 할 수 있다.
당시 우골탑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던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방법 외에 우리나라 발전에 필요한 고급 인력을 양성할 방법이 따로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없었다면 박정희 정권의 1960년대 산업개발이 가능했을까?
195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전략이 도입되었다면 필자는 그 정책은 백프로 실패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1945년 당시 문맹이 전 국민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나라에서 산업화를 시도해 봐야 그 결과란 뻔한 것이다.
결국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위해서는 1950년대, 교육을 증설하고 문맹률을 떨어뜨리는 등, 국가의 인재를 키워내는 일에 전력한 그 시기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라 하겠다.
흔히 "자유당때"로 폄하되는 한국의 50년대는 바로 그런 시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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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골탑을 쌓기 위해 대학을 증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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