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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농지개혁과 우골탑

by 초야잠필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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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1960년대까지 대학이 인위적으로 무리스러울 정도로 증설되고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을 증설해도, 농민이 소를 팔아 등록금을 낼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지 않겠는가? 

당시 한국은 대학까지 무상교육 같은 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단계였다. 

해방이후 한국 교육에는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시대 말까지 80퍼센트를 육박한 소작농이 급격히 줄어들고, 비록 영세할망정 자작농 숫자가 급증하였다. 

 

일제시대 내내 높게 유지되던 소작농의 비율은 해방후 농지개혁으로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자작농의 숫자가 늘어난것은 비록 영세하나마 이들이 "우골탑"을 쌓기 위한 등록금을 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지개혁은 한국 교육사에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농지개혁으로 영세하나마 자작농이 급증하면서 우골탑을 쌓기 위해 "소를 팔 정도의 역량"이 되는 농민이 다수 생겨났다는 점이다. 이들이 자식들 미래를 위해 기꺼이 소를 내다 팔면서 비로소 한국 사립대학은 유지가 될 수 있었고, 이들은 한국의 근대화에 필수적이었던 "대학 졸업생"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둘째는, 농지개혁으로 코너에 몰린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으며 받은 보상금을 사립교육재단으로 돌릴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다. 이는 "지주들이 농지개혁 국면에서 편법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할수 있게 해 준" 것으로 폄하하는 글도 많이 보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어쨌건 농지개혁 당시 지주들의 재산이 당장 국가에 필요한 고급인력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투자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농지개혁 국면에서, 사립교육재단으로 전환을 시도하지 않은 지주들은 거의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실패하고 소멸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우골탑은,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의 "대학설립 드라이브"에 "농지개혁"이 맞물리며 이루어진 성과라 할 수 있다. 

당시 우골탑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던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방법 외에 우리나라 발전에 필요한 고급 인력을 양성할 방법이 따로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없었다면 박정희 정권의 1960년대 산업개발이 가능했을까? 

195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전략이 도입되었다면 필자는 그 정책은 백프로 실패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1945년 당시 문맹이 전 국민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나라에서 산업화를 시도해 봐야 그 결과란 뻔한 것이다. 

결국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위해서는 1950년대, 교육을 증설하고 문맹률을 떨어뜨리는 등, 국가의 인재를 키워내는 일에 전력한 그 시기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라 하겠다. 

흔히 "자유당때"로 폄하되는 한국의 50년대는 바로 그런 시대였던 셈이다. 

 

*** previous article *** 

 

우골탑을 쌓기 위해 대학을 증설하라

 

 

우골탑을 쌓기 위해 대학을 증설하라

우골탑은 대략 6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사립대학이 농부들의 소판돈을 빨아 들여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용어다. 하지만,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우골탑을 쌓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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