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는 무능과 부패로 얼룩했다고 간단히 정의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1945년 당시 문맹률이 77.8 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이라 이런 문맹 국민을 이끌고 산업화는 애초에 무리인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50년대는 시작되지 못하고, 60년대 중반에나 시작된 책임을 이승만 정권의 무능에만 돌리기에는 무리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1945년 이후, 60년대까지 초-중-고 교육을 정비하여 학교와 학생을 꾸준히 늘려간 결과가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문맹률 급감이다.
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이미 문맹률은 10프로 내외로 떨어졌다고 보지만, 실제 문맹률은 이것보다는 아직 더 높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60년대 중반부터의 경제개발은 저렇게 문해율이 올라간 국민이 출현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해방직후 대학이 단 한개이던 나라에서 우골탑 덕에 80년대 들면 공사립 포함 200개가 넘는 대학이 증설되면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학 부실화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나온 이야기가 "놀고대학생", 그리고 강의노트 한권으로 정년 때까지 버틴다는 전설적 교수들 이야기였다 (실제로 필자가 대학다닐때까지도 교수 중 그런 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가 소 팔아 보내는 대학에 보내놓으면 그 아들은 4년간 "놀고 대학생" 노릇을 한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물론 이렇게 놀고대학생 4년을 거쳐도 일단 대졸자가 되면 이들은 당시 호황이던 경제 덕에 어딘가 취직을 했고 그후에는 산업화 시대의 가장으로 또 그렇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
"놀고대학생"은 "우골탑"과 어쩌면 상반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종이 양면과 같은 관계였고, "우골탑" 아버지는 "놀고대학생" 아들과 방학 때면 그렇게 밥상을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골탑" 아버지가 "놀고대학생"인 아들에게 기꺼이 소를 팔아 등록금을 건네줄 수 있었던 것도 그 녀석이 그렇게 평생 놀지 않고 결국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previous article ***
농지개혁과 우골탑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0년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 (0) | 2023.03.24 |
---|---|
해방당시 문맹률 78%의 이유 (1) | 2023.03.24 |
농지개혁과 우골탑 (0) | 2023.03.23 |
우골탑을 쌓기 위해 대학을 증설하라 (0) | 2023.03.23 |
우골탑의 전설 (0) | 2023.03.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