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제시대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였다는 것을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교육체제의 대표적 예로 거론하는데
실제로 일제시대의 "구제"교육체제를 분석하면 경성제대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고등학교" 문제다.
일본의 구제 교육제도에서 "고등학교"는 45년 이후 "고등학교"와 성격이 다르다.
45년 이전 "고등학교"는 대학의 예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 대학본과로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본과를 졸업해야 학사학위가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고등학교는 대학교육으로 이어지는 가장 formal한 경로였던 셈이다.
이전에도 썼지만, 일본에는 45년 이전 전국에 총 38개 고등학교가 있었고 여기에서 매년 21만명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나왔다.
바로 이 고교 졸업생이 사실상 "대학입학의 예비후보군"이 되는 셈이다.
45년 이전 일본을 이끌어가는 모든 인텔리가 바로 중학-고교-대학본과로 이어지는 formal한 교육과정에서 배출되었다.
반면에 조선 땅에는 경성제대 예과 하나만 고등학교 과정이었고, 고등학교에 준하는 과정으로는 "전문학교"가 있었다.
이 전문학교가 바로 일제시대의 유명한 보성전문, 연희전문 하는 그 전문학교다.
전문학교도 원칙상으로는 여기를 졸업하면 고졸 경력이 인정되어 대학본과 진학이 가능했지만, 전문학교 졸업생으로 대학본과에 진학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전언으로는 대학본과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대학예과나 고등학교 학생을 우선 선발하며 결원이 있을때 전문학교 졸업생을 뽑았던 것으로 안다.
이는 무슨 말인고 하면, 조선에서는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만 달랑 설치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 본토에는 38개나 있던 고등학교가 단 하나도 조선 땅에는 없었던것. 이게 더 문제라는 말이다.
앞에서도 썼지만 조선땅에 있었던 "고등보통학교 (약칭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중학교 과정이다.
여기는 나오면 "고등학교"를 진학하거나 "대학예과", "전문학교"를 진학해야 하는데 조선땅에는 "고등학교'가 없고, "경성제대 예과"는 조선인에게는 진입문턱이 높아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은 "전문학교"밖에 없었다.
조선땅에 남아 공부하던 사람 중 수재들이 마지막 학벌로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를 나오면 "고졸"경력이기 때문에 경성제대 본과에 합격하지 않는 한 학사호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가야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시대 "고등학교" 문제가 매우 심각했음에도 최근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가 거의 없는 것은, 조선땅에 당시 존재했던 "고보"를 "고등학교"로 인식하고 실제로 "고보" 졸업생도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해방 이후 "고보"가 "고등학교"로 대부분 승격하기는 했지만, 일제시대에 "고보"는 "고등학교"와 분명히 달랐고 확실한 "중학교"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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