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한석홍 선생
문화재계 역시 그 기여한 바에 견주어 제대로 조명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에 이른다. 발주받은 작업을 묵묵히 수행한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문화재 역시 다른 부문이나 마찬가지로, 여러 악기가 어울려 빚어내는 교향곡이다. 각각의 악기는 각기 따로 놀기도 하지만, 언제나 전체라는 틀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듯 꿰맞추어 돌아간다. 톱니 하나가 빠져도 톱날은 돌아가나, 모든 톱날이 완결할 때 목재는 비로소 송판이 되는 법이다.
예서도 이른바 쟁이라 부른 사람들이 있다. 그 쟁이 그룹 중에 사진작가가 한 몫을 차지한다. 현재도 이들의 활약이 문화재계에서 눈이 부시다. 이 분야 1세대 혹은 2세대라 이름할 기라성 몇 분이 있다. 한옥 촬영의 1인자라 일컫는 김대벽 선생과 유물 촬영의 독보를 개척한 한석홍 선생 같은 이가 그들이다. 이 두 분은 이미 타계했다.
작품 말고는 그네들 일생을 이렇다 하게 남기지 않은 이들이다. 지금이야, 그리고 더 후대에도 한석홍이라는 이름은 더는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케케한 도록에서 겨우 '사진활영 한석홍'이라는 칸에서 발견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기록해야겠기에, 내가 그런 일 하나쯤은 해보겠다고 나서기도 했지만, 언제나 용두사미였다.
한 선생에 대한 더 상세한 자료는 내가 수집하고, 나아가 선친 뜻을 이어 같은 길을 걷은 한정엽 선생을 통해 좀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해 열전 하나를 써보기로 기약한다. 그에 앞서 우선은 그의 타계를 전한 내 과거 기사를 갈무리해 둔다.
한석홍 촬영 석굴암 십일면관음상
2015.03.30 17:11:58
국보 찍던 사진작가 한석홍 타계(종합2보)
문화재 사진 개척자, 71년 이후 박물관 유물 촬영 도맡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화재 사진 개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석홍(韓晳弘) 작가가 30일 오전 3시27분 타계했다. 향년 75세.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같은 길을 걷는 아들 정엽 씨는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폐렴 증세로 입원하셨다가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해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말했다.
고인과 가까운 이병윤 작가는 "작년 말에 뵐 때만 해도 건강하셨고,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제주 서귀포 출신인 고인은 이미 타계한 김대벽, 그리고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안장헌 씨와 더불어 국내 3대 문화재 사진작가로 통했다. 고 김대벽 씨가 건축물 분야 사진에서 일가를 이루고, 안장헌 작가가 야외 불상 촬영으로 명성을 쌓은 데 견주어 고인은 실내 유물 촬영의 제1인자로 꼽혔다.
그들 아는 사진작가들은 "2000년대 이전 우리에게 익숙한 국립박물관 도록 유물, 특히 국보 사진 대부분이 선생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실내 유물 촬영의 교범을 만드신 분이며, 그렇기에 선생님 자신을 '국보'로 불러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한석홍 촬영 호림박물관 소장 보물 . 1451호 청자상감운학국화문병형주자
고인의 스승인 이경모라는 사람이 해방 이후 문화재 사진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해방 이후 문화재 사진은 이들을 개척자로 친다. 특히 고인은 국립박물관을 필두로 국내 저명한 공립 혹은 사립박물관 미술관 유물 촬영을 도맡아 했다.
고인의 이런 이력은 김원룡이 관장, 고 최순우가 미술과장으로 재직하던 1971년 국립박물관 주최 '호암 수집 한국미술특별전' 사진 촬영을 한 데서 시작한다.
아울러 고인은 호암미술관이나 호림박물관 같은 국내 굵직한 사립박물관 유물 촬영도 활발히 했다.
이 과정에서 1976년 한석홍사진연구소를 설립하고, 그해 '한국미술오천년전' 도록을 촬영했다. 그의 황금기는 '세계도자전집 18-고려편'(일본 소학관. 1978), '세계도자전집 17-한국고대편'(일본 소학관. 1979) , '세계도자전집 19-이조편」촬영'(일본 소학관. 1979), '국보' 시리즈(예경산업사. 1983~1985) 등으로 이어졌다.
거의 모든 국보가 고인의 셔터를 거쳐서 새로 태어났다.
개인전도 병행해 1988~1989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한석홍사진전-전통미술의 세계'를 열기도 했으며,1989년에는 비엔나민속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95년에는 '대고려국보전' 촬영을 했다.
고인은 유물 중에서도 고려청자 촬영에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2001에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고인의 이력 중에서 특이한 점은 1998년 무렵에 터진 국립박물관과의 사진 저작권 싸움이었다.
그 이전까지 박물관 유물 사진은 모든 저작권이 박물관에 귀속한다고 간주됐다. 하지만 이것이 부당하다고 느낀 고인은 박물관을 상대로 저작권을 주장했다. 유물이 박물관 소유라고 해도, 작가의 창작 정신은 보호받아야 하며, 그렇기에 자신이 촬영한 유물 사진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와 생계 문제 등이 겹쳐 이런 투쟁이 소송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고인은 결국 박물관과 '98년 이전 유물 사진 저작권은 박물관과 한석홍 공동 소유, 이후 촬영분은 박물관 소유'라는 선에서 타협했다.
이 사건은 사진 저작권 논란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박물관과 관계가 한때나마 서먹해진 일도 있다.
고인은 타계 직전 자신이 촬영한 문화재 관련 사진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엽 씨는 "아버지 뜻을 존중해 모든 사진 권리를 사회로 돌릴 방침"이라면서 "이것이 아버지가 국가와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빈소는 가톨릭대 여의도 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다음달 1일 오전 10시. ☎(02)3779-2190.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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