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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덕수궁 명칭 변경론과 관련한 김태식의 토론 추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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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는 문화재청 주최 '덕수궁(사적제124호) 명칭 검토 공청회'가 있었거니와, 그에서 나는 토론자로 참여해 경운궁으로의 명칭 변경을 찬성하는 발표를 비판했거니와, 대회 개최 전에 주최측에 미리 제출한 내 토론문 '덕수궁德壽宮이 일제日帝 잔재殘滓라는 망언에 대하여'는 이미 이곳 블로그에 전재했거니와, 행사 당일 나는 현장에서 그 토론문과는 별개로 반대론을 보강한 추가 토론문을 현장에서 직접 제기했으니, 그것이 다음이다. 아래서 보듯이 나는 이 명칭 변경을 추진한 문화재청의 절차가 잘못되었으며, 나아가 맹렬한 찬성론을 전개한 홍순민 교수의 논거를 붕파하고자 했다. 결국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환치하고자 한 시도는 좌절됐다. 하지만 이 건은 언제건 다시 준동할 채비를 한다. 



덕수궁 명칭 변경론과 관련한 김태식의 토론 추가

 

1. 문화재청에 대하여 : 절차에 문제가 있다.


20119월 15일 문화재청은 덕수궁 명칭 변경 추진과 관련한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이르기를

 

문화재청은 올해 7월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을 변경하여 고시했으나, 당시 덕수궁의 명칭은 덕수궁으로 유지할 것인지, 경운궁이라는 옛 이름으로 환원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고 했다. 이에서 함께 다뤘다는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은 토론자가 알기로 주소를 부여하거나, 관할 행정구역 변경 등에 따른 것으로 안다한데 덕수궁은 왜 문화재위 안건에 올라갔는가안건에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올리는 이유가 타당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무 것도 학문적으로 엄밀히 검증되지 아니했다. 변경론자가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사실을 운운했지만, 그런 주장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역사적 史實일 수는 없다. 이러한 주장은 검증을 거치기 전에는 의의 제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대한 검증도 없이, 그런 검증되지 않은 이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런 안건이 문화재위원회에 올라갈 수 있는가?


요컨대 덕수궁 명칭 변경과 관련한 문화재청의 절차 자체가 잘못되었다.

 

2. 홍순민 교수의 발제에 대하여

 

a. 홍 교수 발표에도 드러났듯이 덕수궁은 이미 태조 이성계의 退邸에 대해서도 사용됐다. 이로써 보건대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일제 잔재하고는 하등 관계없으며 퇴위한 帝王의 저택에 대해 사용하는 일반명사 같은 명칭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 아닌가?

 


b. 퇴위한 고종의 거처로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그리고 부호를 승녕부로 정한 주체는 순종 아닌가? 무슨 일제인가?

 

c. 홍 교수

 

순종 즉위(1907)82일 궁호, 부호를 정할 때,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주도한 행태는 망()을 보통 삼망(三望), 곧 셋을 정하여 올려 임금이 그중에서 하나를 낙점(落點)하게 하는 이전의 관행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그 후보 명칭조차도 새로 정한 것이 아니라 태조의 것을 그대로 빌어 한 것은 매우 무성의한 행위였다.”

 

홍 교수 견해에 따르면 덕수궁이라는 궁호는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빌린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여 이것이 일제의 잔재란 말인가더불어 단수 후보로 궁호와 부호를 올린 것이 어찌하여 매우 무성의한 행위일 수 있는가?

 

d. 홍 교수는 이런 궁호 부호 책정을 주도한 인물로 이윤용을 지목하면서 이르기를

 

특히 이윤용이 이완용의 서형으로서 그의 친일 행각이 매우 현저함으로 볼 때 궁호, 부호를 정한 것은 고종과 대한제국 조정의 뜻이라기보다는 일제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묻는다이런 언급이 과연 역사학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린가?

 

e. 홍 교수는 또 이르기를

 

덕수궁은 태조가 양위한 뒤 1408524일 승하하기까지 10년 가운데 8년간만 상왕태상왕의 거처 이름으로 쓰였고, 그 이후는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 성종 연간 어간에는 후궁의 거처보다도 서열이 낮은 궁궐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한 사람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요컨대 그렇기 때문에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격이 낮다는 것이다묻는다.


창경궁은 애초 후궁을 위한 건물 아니었던가?


f. 홍 교수는 또 이르기를

 

이로 보건대 순종이 이어하였던 즉조당을 비롯한 본래의 경운궁 영역은 그대로 경운궁으로 불리었고, 덕수궁이 가리키는 공간 범위는 그 당시 고종이 머물던 중명전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덕수궁 시대에도 경운궁하고 덕수궁이 따로 있었다는 의미로 홍 교수는 해석하면서 그 근거로 각주 18번에서 다음과 같은 황성신문 기사를 들었다

 

再昨日午前十時皇上陛下오셔 慶運宮에셔 德壽宮幸行오셧다가 午後四時二十分還宮오셧다더라.

 

홍 교수의 사료 해석 능력이 도처에서 의심이 되므로 알기 쉽게 내가 풀어준다.

 

再昨日午前十時皇上陛下오셔 慶運宮에셔 고종황제(德壽宮)幸行오셧다가 午後四時二十分還宮오셧다더라.”

 

위에서 말하는 德壽宮은 장소가 아니라 퇴위한 황제, 태황제 고종을 말한다. 황성신문시대에 무수하게 보이는 덕수궁 전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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