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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독립군 광복군은 대체 규모가 얼마였을까

by 초야잠필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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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이라고 하면 뭐 꼭 우파 독립군만 지칭하는 것은 아닐 테고, 

좌파계열 독립군도 해방 이전 활동했으니 이 부분까지 모두 포괄해 이야기 해 본다면, 

이들 병력은 대략 어느 정도 되었을까? 

 

광복군이 이랬다고

 

독립군에 대한 기술을 보면 몇 백 명 정도 수준을 적은 경우도 있지만 수천명 단위까지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모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인지 난감할 때가 많다. 

전쟁과 유격전이라는 것이 어차피 자기측에 유리한 선전전은 기본 장착이라, 

그 당시 이야기나 회고라고 해서 병력과 전과에 대한 기술이 백프로 맞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해서다. 

필자도 무슨 대단한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정은 자유롭게 해 볼 수 있다면, 

필자는 일단 지속적 보급이 되는 상황이었는지를 본다. 

예를 들어 만주-. 

이 지역은 30년대 이후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통제가 강화하기 시작한 터라, 

독립군이 있었다 해도 소수 유격부대 이상은 유지가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설사 어느 순간 숫자가 불어나는 시기가 있더라도 먹고 자고 쓰는데 감당이 안 될 터이니. 

유지 가능한 세력 이상으로 불어나는 것이 반드시 유리하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을 터. 

동북항일연군의 경우 많을 때는 몇천명 이상이었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과연 30년대 후반 만주에서 몇천 명 이상 병력이 유지가 되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라 본다. 

 

이 양반은 봉오동인가 전투 이후 나이도 있고 여러 사정이 겹쳐 실상 이후에는 은퇴 생활했다. 극장에서 일했다.

 

동북항일연군 산하 김일성 부대라는 것도 많으면 몇 백, 적으면 몇십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이들은 40년대 이후 해방 때까지는 소련령으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전투없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40년대가 되면 독립무장항쟁사에서 이들을 다루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40년대 소위 조선의용군이나 광복군을 보게 되면, 

이 두 세력이 40년대 중국방면 무장독립운동을 꾸려 나가던 두 집단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도 어느 정도의 병력이 유지된 것은 사실 국공합작으로 중국쪽 사정이 정비되면서 

국민당 정권의 안정적 지원이 생기면서 비로소 유지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은, 위로는 국민당 정권, 그리고 조선의용군은 소위 팔로군 등-.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집단이 없으면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조선의용군은 몇천 명까지 불었다는 이야기도 간혹 보는데, 

이것은 유심히 따져보면 해방 이후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지원자가 충원되었을 때 이야기고, 

대전 기간의 병력은 많아야 몇백 이상을 넘지 못했다고 본다.  

이것은 광복군도 마찬가지로, 해방이후 여러 사람을 추가로 영입하여 귀국전 그 수를 크게 불렸는데, 

정작 대전 기간에는 병력이 300-500명을 넘었던 적이 없었다. 

거기다 대전기간에는 조선의용군이건 광복군이건, 

이들은 정규 전투요원이 아니었다. 거의 선무공작에 투입되어 있었고, 

동북항일연군은 아예 소련령으로 대피하여 소련군 산하 88여단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대전기간, 40년대의 소위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단지 이 시기 무장항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측의 말만 백프로 믿고 병력을 따져서는 안되며, 

남아 있는 다른 기록들과 대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1910-1920년대 독립운동, 무장항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제3자 사료에 입각하여 상호 검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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