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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독립군 전투의 의미

by 초야잠필 2023.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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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규모와 전과에 대해 설왕설래 하지만, 

이 전투의 전과에 대한 이견은 사실 처음 일본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고 연변지역 조선족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런 이견이 제시된 연원도 꽤 길다.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봉오동 전투의 전과인 일본군 전사자가 한국측 주장에 의하면 157명, 일본측 주장으로는 1명, 

그리고 청산리 전투의 경우 한국측 주장은 1200명, 일본측 주장으로는 11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냈다고 하여 그 차이가 무척 큰데, 

필자의 생각을 써 보면 사실 이 두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이 몇 명 죽었느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보급도 없고 현지조달로 보급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 부대는 정규부대라기 보다 유격전을 펼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살수대첩 정도의 대승을 거두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설사 일본측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이런 전투는 나름의 정치적 의미가 더 크기 때문에 전과의 대승 여부로 그 의미를 재단할 수는 없다. 

설사 독립군측 주장대로 이쪽이 대승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한국의 독립이 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 전투가 국내와 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그 결과 조선인들이 그 결과에 고무되었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일제시대 독립군 전투는 규모가 클래야 클 수가 없고, 또 그 전과도 상대적으로 미미할수 밖에 없는데 본래 유격전 성격이라는 것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원래부터 정치적 의미가 큰 전투들이라 굳이 전과에 연연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P.S.1) 북한정권이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현재 4대째  김일성 집안 북한 압제의 근거로 삼는 소위 보천보 전투-. 

이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측 전사자는 경찰 7명이었고 보천보 마을 관공서 방화 소실이 전부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처럼 이 전투 역시 전과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컸다고 할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된 "조선의용군". 이 군대 활동도 많이 과장되어 알려져 있다고 필자는 본다. 이 부대 활동 역시 그 전과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이 지도에는 광복이후 만주, 한국 이동으로 써놨지만 사실 이 부대는 사단편제를 깨지 않고 그대로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사단으로 전환하였다. 한국전쟁 초기에 남쪽이 압도적으로 밀린 것도 사실 이들 때문이었다. 이 지도 출처는 정확하지 않은데, 마지막 "광복후~"부분은 "한국으로 이동"처럼 대충 뭉개서 쓸 것이 아니라 북한으로 입북하여 인민군이 되었다고 정확히 적어줘야 한다. 역사의 왜곡은 이런 사소한 "글 뭉개 쓰기"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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