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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제시대말: 학병이 일본군 소위 되기

by 초야잠필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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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또래는 아마 대학 때 "문무대"와 "전방입소"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대학 1학년 "문무대", 

대학 2학년때 "전방입소"를 해서 단기간 군사훈련을 받은 것으로, 
뭐 일차적인 목적은 당시 대학생들이 하도 데모를 많이 하다 보니 잡아다가 조국의 분단현실을 체험하게 해라~

라는 당시 군사정권의 발상에서 나온 과정이었는데, 

필자 기억으로는 학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문무대를 가건 전방입소를 하건 그것 때문에 하던 데모를 안할 리는 없고, 그건 그거대로, 이건 이거대로 그랬다. 

일제시대 말. 

스스로 원해서 육사나 만군군관학교에 진학한 경우를 빼면, 
학병장교가 남게 되는데, 당시 학병장교라는 건 요즘으로 치면 딱 학군사관 ROTC 정도 된다. 

전문학교 재학 이상의 고등교육자 중에서 선발하여 단기간 교육시킨 후 장교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당시 소위라는 것은 거의 소모품이나 다름없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었으므로 고학력자는 탐나는 장교재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학병장교는 그야말로 다 죽어나가는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은 일본군도 알고 있었으므로-. 

학병은 문과생을 위주로 뽑았다. 이과생은 후방에서 쓰임새가 있으니 일단 놔두고 문과생을 먼저 뽑아 데려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학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문과생이 대부분인 것은 이 때문이다. 학병에는 이공계나 교사의 경우, 안 끌고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학병으로 끌고가면 약 1년 반 후에는 장교가 되는 것으로, 
44년 1월에 입영한 사람들이 45년 8월경에는 장교 임관 직전에 있었다. 

원래 학병출신은 45년 8월 15일 현재, 정식 장교가 아니라 "예비장교"신분이었다. 

예비소위로 각 부대에 배속되어 수습 중인 인턴 같은 존재였는데, 
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패색이 짙어지자 그동안 고생했는데 수고했다고 

망하기 전 학병들에게 소위 계급장을 하나씩 달아주고 임관을 덜컥 시켜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군 소위"가 제법된다. 

현승종 선생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이 양반 말고도 대전 말기까지 도망 못가고 일본군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일본군 소위"가 되어 해방을 맞았다. 

글쎼. 

학병이 되어 도망갔으면 좋았겠지만, 탈영이라는게 쉽지 않은건 지금이나 당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탈영 못했다고 끌려가 졸지에 일본군 소위가 된 사람들을 무리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름 억울하게 일본군 장교가 된 양반들이 해방 이후 남긴 수기가 바로 소위 말하는 "학병수기"다. 

지금도 헌책방 같은데 가면 꽤 많이 볼 수 있다. 

학병수기를 보다 보면 "나는 죽어도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많이 보인다.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본인의 마음에 걸렸으면 저걸 저렇게 써서 수기로 남길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이렇게 탈영한 사람들은 수기로 남길 수 있었지만, 

탈영을 못하고 졸지에 "일본군 소위"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현승종 선생처럼 평생을 감추고 살았다. 

탈영이 도덕적 의무가 되었던 시대라니!! 

참 험난한 시대였다 할 것이다. 

학병수기는 찾아보면 꽤 있다.



*** Editor's Note ***

한국선박사 한국조선사 개척자 김재근 박사가 학병 대신 군수공장에 남은 경우다.

경성제국대학 요즘의 공과대 출신인 그는 인천 군수공장에 취직해 군함을 만드는 일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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