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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독야청청 윤병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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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독립운동사 연구자 윤병석 명예교수 별세 | 연합뉴스

원로 독립운동사 연구자 윤병석 명예교수 별세, 박상현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04-23 20:04)

www.yna.co.kr

 

연구자로서 이런 복된 삶을 산 사람이 있을까 싶다. 호사를 누렸다는 말이 자칫 망자한테는 누가 될 수 있는 말임을 알지만, 연구자로서 고위 임명 공직을 빼고는 누릴 만한 자리는 다 누렸으니 그는 분명 호사한 사람 맞다. 

 

23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윤병석 선생을 내가 마지막 조우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대략 80대 중반인 그때도 이 양반 상당한 연배셨는데, 멀쩡했다. 건강은 타고 나지 않았느냐 하는데, 장수했다. 

 

우리 공장 DB에서 그를 검출하니, 운회雲淮라는 아호를 쓴 그는 본관이 그 유명한 파평坡平이라, 윤관을 중시조로 삼는 그 명문가 출신으로, 태생은 충북 제천이다. 전쟁이 나던 1950년 제천농중을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학과 사학과에 들어가 1957년 졸업했으니, 저 무렵에는 아마도 두계 이병도와 동빈 김상기, 일계 김철준 등등이 교편을 잡고 있을 때가 아닌가 하거니와, 특히 김철준과의 관계가 돈돈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윤병석

 

 

박사학위가 없는 그는 1995년 숭실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 무렵에는 학사 졸업해도 웬간하면 교수가 되던 시절이 아닌가 하지만, 어떻든 국사편찬위원회로 가서 근무하면서, 어찌된 셈인지 모르겠지만, 초고속 승진을 했는지, 1961년에 이미 그 편사조사실장이 된다. 그의 국편 동기가 되는 분이 박성수 선생으로 안다. 

 

김창겸 선생이 전하는 박성수 선생한테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윤 선생과 박성수, 그리고 한양대인가 있던 다른 선생까지 친구 셋이서 어느날 관악산 연주암을 갔더랬다. 한데 거기 남근석에다가 여인들이 아들 점지해 주십사 기도를 하는지라, 윤 선생과 박 선생 두 분도 기도를 하고 복비도 냈더랬다. 그것이 효험을 봤는지, 두 분은 아들을 봤단다. 당시까진 아들이 없던 윤 선생한테도 "당신도 가서 기도하라" 하니, 독실한 기독교도인 선생은 "나는 그런 미신 안 믿는다"며 거절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인지 두 분 선생은 아들을 봤더랬다. 암튼 그걸 보고 박성수 선생은 "그 남근석 효험 있구만" 했더랜다. 

 

문제는 윤 선생. 나중에 알고 보니 윤 선생도 연주암 가서 기도를 했더란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박 선생이 껄껄 웃더랜다. 저 부고 기사를 보면 유족으로 아들이 한 명 보이는데, 그 아들이 아마 연주암 기도의 산실 아닌가 모르겠다. 

 

그의 일생에서 국편은 이후 그가 학계를 주물하는 발판이 된다. 1976년 인하대가 사학과를 창설하자 그 주역으로 옮겨가 교편을 잡기 시작해 1995년 정년퇴직한다. 인하대 재직시절,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서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서영대와 경북대 있던 한영국 등을 교수로 불러들인다.  

 

그의 이력을 보면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학연구실장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이 자리가 바로 김철준 선생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서영대 선생이라 한다. 한시준 선생은 그의 대학원 제자가 아닌가 한다. 

 
학교 보직은 빼고, 그는 각종 학회 혹은 연구회 회장은 거의 다 해봤다. 1987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장, 1999년 도산사상연구회장, 2000년 매헌연구원장, 2005년 백암학회 회장을 지냈다. 긴 생애만큼 각종 상복도 많아. 치암학술상, 월봉학술상, 외솔상, 의암대상 등을 수상하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국독립운동사가 전공인 만큼 이 분야 저서와 논문이 많다. 그 세대가 으레 그렇듯 제자들이 많이 도운 것으로 안다. 

 

부인이 한국외대 교편을 잡은 이은순 선생인데, 이화여대 김성준 선생 제자다. 조선후기사를 전공했다고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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