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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돌아갈 배가 언제 올지 모르는 일본

by 초야잠필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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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견당사遣唐使 이야기인데, 

기록을 보면, 견당사는 중국 쪽에서는 대략 30년에 한 번 정도 오기를 희망한 듯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의 조공사가 그렇듯이 일본은 이보다 훨씬 자주 보냈다.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배가 오가는 것은 아니어서 대략 길면 십수년 정도의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당 유학생을 대략 이 견당사에 실어 보냈는데, 앞서 언급한 일본 천태종과 진언종 개조인 사이초[최징最澄]와 구카이[공해空海]는 804년에 파견된 제 16차 견당사를 따라갔는데, 이때 총 4척의 배가 중국으로 향했는데 그 중 1척은 난파, 1척은 실종되고 2척만 중국에 도달하였다.

일본에서는 당나라까지 보내는 배의 운항 기술은 항상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는데, 중국을 오가는 배편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서 원거리 항해에 관한 기술이 축적되지 못한 탓이다. 

 

견당사. 목숨을 건 사람들의 모험이었다.

 
일본 유학생이 당나라에 도착하면 돌아갈 방법은 결국 "대개 그 다음해 돌아가는 견당사 배편을 타거나" 아니면 "그 다음번 견당사의 돌아가는 배편"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타고온 배를 타고 돌아가지 않는 장기체류를 기도한다면 최장 30년을 중국에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구카이와 사이초의 경우 804년에 당나라로 왔는데 이들은 각각 805년 (사이초)와 806년 (구카이)에 일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원래 최소한 10년의 유학을 서약하고 왔다는데 겨우 1-2년만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이초의 경우, 중국말 배우는 것이 늦어 대화가 안 되었을 정도였다는 것이고, 

구카이의 경우, 가지고 온 돈을 2년 만에 다 써버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이초는 당에 온 다음해, 타고온 배를 타고 귀국해 버렸고, 

구카이는 그 배를 놓쳐 1년을 더 있다가 당초 파견되었다가 실종된 1척의 배가 다행히 중국에 재파견되어 돌아가는 그 배를 타고 2년 만에 귀국하였다. 

만약 구카이가 이 배를 놓쳤다면 그는 당나라에서 거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다음 견당사는 32년 후에 당나라에 왔기 때문이다. 

 

 

신라는 8세기 중엽 이후 신라방 등 각지에 거주지가 운영되어 일본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릴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유학이 쉬웠을 리가 없다. 이 시대 유학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목숨을 건 모험에 해당했을 것이다. 

참. 여담이지만, 사이초와 구카이는 각각 1년, 2년짜리 단기유학이라도 일본으로 돌아가 헤이안 시대에 건립된 천태종과 진언종의 개조가 되었다.

천태종에서 나중에 일련종과 정토종이 갈려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은 일본불교의 가장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구카이야 그렇다 쳐도 사이초는 중국사람과 대화를 못할 지경이었다는데 중국가서 뭘 배워 갔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항상 난파하여 죽을 위험이 있었던 견당사는 감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아야 할 일이다. 

 

소위 헤이안 2종인 천태종과 진언종의 개조는 같은 배를 타고 당나라에 유학했었다. 이 둘이 세운 천태종과 진언종은 일본 불교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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