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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졸옹拙翁 최해崔瀣, 조상 최치원崔致遠을 평가하다

by taeshik.kim 2021.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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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고운 최치원 하면 경주 최씨의 시조요, 나이 12세에 당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해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어지러웠던 신라 하대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리저리 방랑하다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문학가요, 정치인이요, 경세가였다.

그 후예 중에 졸옹 최해崔瀣(1287-1340)라는 분이 있었다.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원나라 과거에 급제했고, 삼국시대부터 고려 후기에 이르는 문학선집인 <동인지문>을 엮은 사람이니 그 또한 고운의 피를 이었다 자부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고운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집 문창공(文昌公 최치원)이 12세의 나이에 서쪽으로 가서 18세인 함통(咸通) 15년 과거에 올라 중산위(中山尉)를 지내고,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幕)을 보좌하였고, 벼슬이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다가 28세에 사명을 받들고 고국에 돌아왔기로 고향 사람들이 이제껏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당나라의 말엽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의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았지만 직이 진직(眞職)이 아니었다. 고국에 돌아오자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끝내 복명(復命)을 못하였으니, 그 평생을 논한다면 근로(勤勞)는 대단했으나 그 영광된 것은 별로 칠 만한 것이 없었다.

<동문선> 권84에 실린 "송 봉사 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라는 글인데, 어조가 매우 묘~하다.

吾家文昌公이라는 표현이야 조상이니 그렇게 쓸 수 있다 쳐도, 마지막 문장은 퍽 짜다는 느낌마저 준다.

졸옹의 눈에는 조상인 고운마저도 눈에 다 차지 못했을까, 아니면 충분히 제 뜻을 펴지 못한 고운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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