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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직전 열린 제2회 국전을 보고 당대의 예술가들이 좌담회를 열었다.
이 분들께 꽤나 뜨거운 주제는 '서예'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재밌게도 서양화 하시는 분들이 그에 대해 크게 둘로 갈렸는데, 이응로(1904-1989)와 이쾌대(1913-1965), 남관(1911-1990)은 그래도 좀 옹호하는 쪽이었고 박영선(1910-1994)과 배운성(1900-1978)은 썩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배운성은 "서예는 공예 속에 넣으면 어떨까 생각하는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을 툭 끊고 다음과 같이 일갈한 분이 있었다.
무식한 말은 집어 치우시요. 서예가 어째서 공예 속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이요. 대실언大失言이니 취소하시요. 그러한 망발이 미술가의 입에서 발언되었다는 것을 나는 불쾌히 생각하오.
이런 사자후를 토해낸 분은 당시 서른셋의 젊은 서예가였던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1918-201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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