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동문선> 권21에는 뒷날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선비 김일손이 지리산을 구경하며 남긴 <유두류록>이란 글이 있다.
자료를 찾을 일이 있어서 그 글을 보다가 지금은 쌍탑만 남은 단속사를 보고 감상을 적어놓은 부분을 만났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ㆍ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 이른다. 강 문경공(姜文景公)의 조부 통정공(通亭公)이 젊어서 여기에와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라, 그 자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한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묵은 덤불 속에 비가 있는데, 바로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憲貞)의 소작인, 중 신행(神行)의 명으로 당(唐) 나라 원화(元和)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추악하고, 그 높이도 대감사(大鑑師)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문자도 읽을 수가 없다. ...
주지가 거처하는 침실로 돌아와 전의 고사(故事)를 뒤져보니, 세 폭을 연결한 백저지(白楮紙)가 있는데, 정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자문지(諮文紙)와 같다. 그 한 폭에는 국왕(國王) 왕해(王楷)란 서명(署名)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요, 국왕 왕현(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다. 이는 정조(正朝)에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이다.
또 한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써있는데, 한 군데 황통대덕(皇統大德)이라 하였다. 대덕은 몽고(蒙古)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상고하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皇統)은 금국(金國) 태종(太宗)의 연호다.
인종ㆍ의종 부자가 이미 오랑캐의 정삭을 썼고 또 선불(禪佛)에게 정성을 바친 것이 이와 같은데,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의 액을 면하지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한다 해도 사람의 국가에 유익됨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좀 먹다 남은 푸른 깁에 쓴 글씨가 있는데, 글 자체가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여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도저히 날개에 붙을 수가 없으니 기묘하기도 하다.
또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가 있는데, 그 자획(字畫)은 푸른 비단에 쓴 글씨만 못하고 모두 단간(斷簡)이어서 그 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또 육부(六部)가 합서(合書) 한 통이 있어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데, 역시 그 절반이 없어졌다.
그러나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다.
잘라서 얹었어도 아주 긴 글인데, 이걸 보면 조선 초까지도 신행선사비와 대감국사비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절 안에는 고려시대 문서도 몇 건이 남아 전했던 모양인데, 푸른 비단, 노란 비단, 자색 비단이라고 한 걸 보니 송광사의 <혜심고신>(흔히 고려고종제서로 알려진)같은 고신(임명장)이 남아 전했던가 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인종과 의종이 대감국사에게 보냈다는 '문안장'인데, 진짜 안부편지인지 아니면 다른 문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종과 의종의 서명이라니 어땠을지 정말 궁금한데 지금은 烏有로 돌아갔으니 아아, 임진란이 참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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