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제법 가까운 옛날만 하더라도 동양화, 아니 한국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국전國展 동양화부 입선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할 만큼 수요는 넘쳤고 그만큼 작품도 쏟아졌다. 그 수요의 정점에 있었던 몇몇 작가가 있었으니 청전靑田, 남농南農, 그리고 의재毅齋였다.
의재 허백련(許百鍊, 1891-1977). 그를 화가로만 아는 이가 많지만 기실 그는 사회운동가라고 해야 맞을지 모른다. 이 나라가 살 길은 농업에 있다 해서 광주농업기술학교를 세우고 무등산 자락에 춘설春雪이란 이름의 차밭을 가꾸었으며,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품고 국조國祖 단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젊은 날 공산혁명을 꿈꿨던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1986)와 평생 교분을 나눴던 것도 그런 뜨거운 마음의 발로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산수와 화조, 기명절지 모두 안온하고 평화롭지만, 어쩐지 쿵쿵 심장이 뛰는 듯 생동하는 느낌이 있다. 매화향기 아득한데 참새 두 마리 지저귀는 이 <동풍취난東風吹暖>도 ㅡ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더러 있으나 ㅡ 새며 매화가지며 정말 봄바람에 살랑이는 착각이 일지만, 구도는 단단하고 강조되는 부분이 또렷도 하다. 화가의 가슴이 나이들어서도 여전히 뜨거워서였을까.
청나라 말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풍류시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가리켜 "도연명은 가슴이 매우 뜨거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는데, 같은 말을 의재에게도 붙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단군사당 건립이 늦어지고, 농업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그 뜨거움이 식어버리고, 그게 의재 화백의 숨을 거두게 한 것이라면 지나친 감상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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