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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드루와! 거란을 농락하는 고려

by taeshik.kim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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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걸친 고려 정벌전에서 거란이 얻은 소득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정벌전에서는 강감찬 강민첨 두 강씨한테 참패를 맛봤으니 가오만 열라 상하고 말았다. 

그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을 요동케 하는 내란이 발발한다. 

발해 왕족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태평太平 9년(1029) 요 왕조 부수도 중 하나인 요양遼陽을 공격 점거하고 흥료국興遼國이라는 별도 왕조를 건국 선포하는 한편 자체 연호가 제정해 천경天慶이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흥료국은 이듬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이 반란은 반란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동아시아 국제정세까지 흔들어댔으니, 신국가 선포 직후 그 신왕조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변국가의 승인을 받는 것이다. 

대연림 역시 고려와 송나라 등지에 사신을 보내서 연합을 제안하게 되니, 고려라고 등신인가? 이 반란 불똥이 어디로 튈 것인가를 가늠하기 마련이라, 맘껏 이 사태를 이용했다. 

그런 고려의 움직임을 거란이 왜 보지 않았겠는가? 얼마나 얄밉겠는가? 

대연림이 반란하자, 고려는 송나라와 더 긴밀해지기 시작했다. 거란으로서는 가장 걱정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서쪽 서하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고려는 강동6주(강동육주) 할양을 계기로 거란에 신속하는 모습을 보이고 공식 조공 책봉 관계를 송과는 단절했다. 간단히 말해 고려는 명목상 주인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꾼 것이다. 

이 질서를 대연림 반란을 흔들어댄 것이다. 

이 반란을 핑계로 고려는 한동안 거란을 개무시했다. 뻔질나게 보내던 사신도 보내지 않았고, 아예 대놓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참다 못한 거란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고려사절요 권4 정종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원년(1035) 5월 조를 보면 거란이 내원성을 통해 고려 전진 기지인 흥화진興化鎭에 보내온 첩牒, 다시 말해 외교문서가 수록됐으니 그 내용인즉슨 이랬다. 

“삼가 생각건대 귀국貴國은 본래 부용附庸이 되었기에 선제先帝(거란 성종)께서 매번 넉넉하게 덕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세월이 오래되도록 오고감[梯航]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난 번 죄인(대연림-인용자)을 토벌하던 해부터 조정에 오는 예禮가 막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흉악한 역도들을 제거하였으니 마땅히 조공을 계속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여러 해가 넘도록 옛 우호를 생각하지 않고 석성石城을 쌓아 큰 길을 막으려 하며 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병奇兵을 방해하려 하십니까. 촉국蜀國 안에 별도로 석우石牛가 다니는 지름길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번 일이 있고 나면 심하게 꾸짖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황상皇上(흥종)께서는 여러 성군의 기반을 이어 세상의 모든 국경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남하南夏의 황제[帝主]는 의義를 사모하여 우호를 나누고 있으며 서쪽 땅의 여러 왕이 길이 우러러 사모하며 납관納款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동해의 땅만이 아직 북극의 존귀한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으니, 혹 격노하시어 벼락을 내려치신다면 어찌 백성[黎庶]들을 평안히 할 수 있겠습니까.

어길 것인지 따를 것인지는 스스로 변통하십시오.”

니들 스스로 우리한테 기어들어오지 않으면 가만 안 있겠다는 협박인 듯하지만, 실상은 사신을 보내서 국교를 재개하자는 화해 제스처였다. 

한데 문제는 언사가 심히 고약했다. 말 안 들어면 쳐들어간다? 이 대목이 심히 고려를 졸라 기분 나쁘게 했다. 
 

드루와!! 드루와바!!

 
그 다음달 고려는 답서를 보낸다. 영덕진寧德鎭에서 거란 내원성에 보낸 답신 첩牒은 이랬다. 

“보내온 첩문에 이르기를, ‘지난 번 죄인을 토벌하던 해부터 조정에 오는 예禮가 막히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흉악한 역도들을 제거하였으니 마땅히 조공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각 생각건대 나라에서는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켰던 초창기, 즉 대국大國에서 군대를 일으켰던 시기를 당하여 길이 막히자 사신을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내사사인內史舍人 김가金哿는 동도東都를 수복한 것을 경하하였고,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수화李守和는 연이어 나아가 방물方物을 헌상하였습니다. 선대왕先大王(고려 덕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합문사閤門使 채충현蔡忠顯이 명을 받들어[將命] 사망을 고하였으며, 선황제(거란 성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 유교柳喬가 급히 가서 장례에 참석하였습니다.

지금 황제(거란 흥종)께서 대통을 이으시자 급사중給事中 김행공金行恭은 사신으로 가서 조하朝賀하였습니다. 그러한즉 요동遼東을 평정하신 이래로 날마다 서로 이어졌는데, 어찌 조정으로 오는 예가 막히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석성石城을 쌓아 큰 길을 막으려 하고 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려 한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주역[羲爻]』에서 요해처에 방비시설을 두는 것은 군주의 통상적인 규범이며 노국魯國에서 관문을 닫는 것은 식자들이 매우 경계하였던 바입니다.

그러므로 저 성채를 늘어세운 것은 우리의 봉토[提封]를 정비한 행위로, 대개 변방의 백성[邊氓]들을 안식시키고자 도모하였던 것일 뿐 황제의 교화를 저버리고 막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오로지 동해의 땅만이 아직 북극의 존귀한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였으나, 예전에 오고간 여섯 명의 사신이 상국上國 안에 억류되어 있고 선주宣州와 정주定州 두 성이 우리 강역 안으로 들어와 축조되어 아직도 반환되지 않았기에 바야흐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폐하께서 국운을 열어 쇄신하시면서 백성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셨기에 천자의 은택이 사방에 스며들고 천자의 곁에서 상소[章奏]가 연이어 아뢰어지는 때를 만났으니, 사신을 방환하고 아울러 침범된 땅을 돌려주시기를 간청하였으나 청한 것을 얻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정성껏 진실대로 응답하셨다면 감히 즐겁게 조공하는 예禮를 게을리 하였겠습니까. 단지 은혜로운 명령에 달린 것이니, 어찌 번거롭게 책망하는 말을 하십니까.

또 이르기를, ‘혹 격노하시어 벼락을 내려치신다면 어찌 백성[黎庶]들을 평안히 할 수 있겠느냐’고 언급하셨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 황상皇上(거란 흥종)께서는 작은 것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낮은 자의 말을 경청하는 재간이 광범하여 이에 화목하게 교류해야 할 지역을 돌보면서 반드시 은혜를 더하여 베푸실 것이니, 무고한 우리에게 어찌 크게 분노하시겠습니까.

보내온 가르침을 상세히 보니 아마도 농담을 하신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끊은 것이 아니다. 다 너희 잘못이다. 너희가 우리한테 한 일을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면서 아주 가지고 논다. 말 안 들으면 군사 일으켜서 쳐들어가겠다는 협박에 저리 말한다. 

그렇다면 왜 고려는 저 무렵 저렇게 자신있게 거란을 대했을까?
간단하다. 이겨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만 쪽수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봐아 종국에는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 딱 하나 그것이다. 이겨 봤기 때문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이다. 

고려로서는 이미 고기 맛을 봤다. 
 
#고려거란 #고려거란전쟁 #고려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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