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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류서(유서·類書), 분류식 백과사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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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유취

         


'유서'란 글자 그대로는 분류식 책이라는 뜻인데, 간단히 말해 분류식 백과사전이다. 우리한테 익숙한 백과사전은 대개 가나다 혹은 ABC 순서로 표제어를 배열하고, 해당 항목마다 그 개념을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하지만, 이 유서(類書)라고 하는 백과사전은 동아시아에서 태동해 발전한 것으로, 주제 혹은 키워드별로 분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까닭에 類書는 해당 분류식 개념어를 적출하고는, 그 개념을 설명하거나, 그것을 주요한 소재로 활용한 先代 문헌에서 관련 구절을 그대로, 혹은 요약해서 배열하는데, 당나라시대에 나온 이런 종류로 대표적인 4가지로 《북당서초》와 《예문유취》와 《초학기》와 《백씨육첩》이 있으며, 이런 사업이 후대로 올수록 더욱 극성을 부려 특히 북송시대에는 《태평광기》라든가 《태평어람太平御覽》 역시 이에 속한다. 

 

주제별 분류라는 점에서 類書는 무엇보다 검색이 용이하고, 그 자체로서도 보는 재미가 쏠쏠해 공구서(工具書)로 특히 인기가 높았다. 더구나 그 서술 체제를 보면, 선대 문헌에 보이는 구절 중에서 핵심만을 모았다는 점에서 특히 시문을 지을 적에도 결정적인 지남자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 태동이 언제쯤인가 하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전한시대에 나온 자전인 《이아(爾雅)》가 분류식 개념어 사전이라는 점에서 그 맹아를 이미 보이지만, 이것으로써 본격적인 류서라 하기에는 저어되는 측면이 많다. 그러다가 우리한테 익숙한 류서로는 삼국시대 황초(黃初) 원년(220)에 손보인 《황람(皇覽)》을 본격적인 남상을 삼는다. 다만 아쉽게도 《황람》은 이미 원전을 망실해 버리고, 그에 인용된 일부 구절만이 다른 문헌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제목으로 보아, 이는 황제가 업무라든가 시문에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할 목적으로 편찬되었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수당隋唐)시대가 개막하면서 거질 류서가 연이어 출현한다. 


송원(宋元)시대 접어들어 류서는 더 거질로 발전하니, 이미 북송시대 초기에 “송초 4대 기서(宋初四大類書)” 출현으로 빛을 본다. 명청시대에는 前代에 비해 류서 편찬 기운이 감퇴된 감은 없지는 않으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최극성으로 본다. 류서가 지닌 여러 기능 중에서 이미 망실해 버리고 만 무수한 문헌의 편린들을 엿본다는 점이 그것이니, 소위 말하는 일서(逸書) 편집에서 류서가 갖는 권능은 가히 절대적이다. 나아가 현재까지 남은 문헌이라고 해도, 후대 판각 혹은 필사과정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있기 마련이라, 유서에 인용된 구절들과 비교함으로써, 어느 쪽이 원래의 저자 의도에 맞는 표현인지를 감별하는 소위 교감학 교재로서도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현재까지 알려진 류서의 남상인 《황람(皇覽)》은 삼국시대 魏 文帝 曹丕 재위시(220~222)에 유소(劉劭)와 왕상(王象) 등이 편찬한 것으로 宋代 들어와 이미 망실됐다. 조비曹丕가 황제이면서 저명한 시인이요 문학가라는 점에서, 왜 류서가 출현하게 되었는지, 앞서 내가 말하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후 南朝 梁나라에서도 劉杳가 편집한 《수광서원(壽光書苑)》이 있고, 유효표(劉孝標)가 편찬한 《류원(類苑)》과 서면령(徐勉領)이 편수한 《화림편략(華林遍略)》, 北齊 後主 때 찬수纂修한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 등이 대부분  《皇覽》을 표방하여 “여러 말을 포괄하고 뜻에 따라 분류하여(包括群言, 區分義別)”하고 “분류에 따라 서로 따르게 하는(隨類相從) 체제를 따랐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 類書로는 隋末 唐初에 우세남(虞世南)이 편찬한 《북당서초北堂書鈔》가 있고, 그 직후 唐 高祖 武德 年間에 구양순歐陽詢이 주편한 《예문유취(藝文類聚)》가 나왔고, 唐 玄宗 時에는 서견(徐堅) 등이 봉칙찬한 《초학기(初學記)》가 따랐으며, 唐 中期 白居易 編撰 《백씨육첩(白氏六帖)》이 있으니, 이중 《백씨육첩(白氏六帖)》은 백거이 편찬설에는 의문이 많으며, 나아가 南宋시대에는 그 시대 공전孔傳이 편찬한 《공씨육첩(孔氏六帖)》과 합쳐져서 《당송백공육첩(唐宋白孔六帖)》이라 하거나 간략히 《백공육첩(白孔六帖)》이라 하기에 이르렀다. 


그 체제는 구체적으로 나는 추후 《초학기(初學記)》를 통해 소개하기로 한다. 


송대 류서를 보면, 앞서 말한 《太平御覽》이 太宗 太平興國 年間에 이방李昉 등이 손을 대서 편찬했고, 真宗시대에는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책부원구(冊府元龜)》를 편찬했으며, 南宋에 접어들어서는 종래 황제의 명을 받는 형식에서 벗어나 왕응린(王應麟)이 순전히 개인 노력을 들여 《옥해(玉海)》를 내놓았으니, 이들은 전대 유서들에 견주어 대단한 거질이다. 


明 成祖 永樂 年間에 纂修한 《영락대전(永樂大典)》도 유서로서, 그 사업 범위는 유사 이래 본 적이 없는 대규모였다. 이를 뛰어넘는 성과는 清代 康熙 末年~雍正 初年에 진몽뢰(陳夢雷) 등이 편찬 책임을 맡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있으니 이것이 인류가 이룩한 최대 백과사전 편찬사업 결과라 불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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