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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호삼성(胡三省. 1230~1302)과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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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성(胡三省)은 원래 이름이 만손(滿孫)이며 字가 신지(身之), 號는 매간(梅澗)이다. 5형제 중 3남이다. 영해(寧海) 중호촌(中胡村) 사람이다.  《論語》에 나오는 “吾日三省吾身”이라는 구절에서 삼성(三省)이라고 개명했다. 다른 字로는 경삼(景參)도 썼다.


보우(寶祐) 4년(1256)에는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사방득(謝枋得)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으며 吉州泰和尉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 해서 부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경원부자계위(慶元府慈溪尉)에 임명되었으나 재임기간 중 경원지부(慶元知府) 여문옹(厲文翁)에게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문학행의(文學行誼)로 추천되었다. 사마광이 주편한 《자치통감(資治通鑑)》 연구에 몰두하고 《통감(通鑒)》을 교감했으며 제자들을 길렀다. 이후 30년간 通鑑에 注를 달고 《음주차치통감(音注資治通鑑)》 편찬에 몰두했다. 47세 때인 지원(至元) 23년(1286)에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를 완성하니 이것이 역대 자치통감 주석서 중 최고로 친다. 하지만 오류도 없지 않아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 卷27에서 그러한 사례를 열거했다.


《宋史》와 《元史》에는 모두 그의 열전이 없다. 민국 초기에 柯劭忞가 《新元史》를 편찬하면서 53字 짧은 문장으로써 《儒林傳》 馬端臨傳 뒤에다가 그의 열전을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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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三省 

 胡三省(1230-1302), 宋元之際의 史學家. 原名은 만손滿孫, 舊字는 경삼景參, 사는 집이 磵의 곁에 위치했고 古梅가 많은 까닭에 “梅磵”을 號로 썼다. 寧海中胡村人이다. 書香門第 출신이며, 아버지 胡鑰篤는 史學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稱하기를 “山澤遺才”라 했다.  


三省은 自幼에 好學하고, 父親 影響으로 功課之餘에는 《通鑒》을 攻讀했다. 그의 父가 《通鑒》 各家注本은 비록 富하지만 단지 音義․釋文 등에서는 乖謬가 甚多하다고 생각하고, 아울러 三省이 天資가 聰慧하고 好學하여 不倦하니, 마침내 逐有期托勘誤《通鑒》之囑. 三省 十五歲 時에 父가 死하니 家가 끝내 艱難해지니, 但三省牢記先父遺願, 益加勤奮. 寶佑 4年(1256), 胡三省은 文天祥․陸秀夫․謝枋得 等과 함께 同登 進士第하고 被任하여 吉州泰和尉가 되었고, 父親이 早亡하고 兄弟는 夭折한 까닭에 侍奉 老母하기 위해 赴任하지 않았다. 後에 慶元府 慈溪尉에 임명되었다. 三省은 剛正하여 不阿하고 諂媚를 섬기지 않으니 任職 期間에 得罪하여 慶元知府 厲文翁에게  彈劾되어 罷官됐다. 얼마 뒤 “文學行誼”으로 추천되어 楊州江都丞이 되었다. 鹹淳 3年(1267), 江淮制置使 李庭芝의 초빙에 응하여 壽春府學敎授가 되어 淮東幕府를 보좌했다. 그후 經考擧及格, 改奉議郞, 知江陵縣. 鹹淳 6年(1270), 母가 去世하니 임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喪服 滿後에 改知安慶府懷寧縣. 同年에 因李庭芝調任京湖制置使, 胡三省才從淮壖回杭州.  


自登第後, 胡三省在案牘之餘致力於《通鑒》的勘校工作. 雖公事冗繁, 仍堅持不懈. 宦遊所至, 見有不同版本之《通鑒》, 務必搜羅;遇有《通鑒》方家, 卽登門求敎. 在杭時, 已編就《資治通鑒廣注》九十七卷, 論著十篇. 賈似道的門客廖瑩中聞其名, 出重金聘請胡三省校勘《通鑒》, 以敎授弟子. 三省撰寫《誰校通鑒凡例》一文. 不久, 廖瑩中又將胡三省推薦給賈似道. 鹹淳十年(1247), 胡三省出任沿江制置司機宜文字, 升朝奉郞(七品官銜). 第二年, 改任賈似道幕僚, 從軍江上. 但與賈意見不合, 凡有建議, 賈槪不采納. 是年, 賈似道督師蕪湖, 二月大敗於呂港. 宋軍潰散後, 三省返寧海, 自此長期匿於鄕裏, 隱居著書, 直至終年.  


德佑 2年(1276), 元軍陷臨安, 俘宋恭帝等多人北去. 元將董文炳率軍南下, 追擊南逃皇族, 所過之處, 燒殺搶掠, 慘不忍睹. 寧漲亦遭兵禍. 胡三省攜帶家少, 遷居新昌. 亂過返家, 發現化了幾十年心血寫成的《資治通鑒廣注》已蕩然無存. 三省不可奪志, 悲痛與餘, 仍變賣家産, 再購《通鑒》, 發憤重新作注. 時年已經四十六歲. 從此閉門絶客, 日夜奮筆. 直到至元 21年(1284), 重撰稿卽將完成, 又寄居鄞縣南湖袁桷家中, 並在袁家最後完成《通鑒》校勘. 至元 23年(1286), 《資治通鑒音注》全部成編, 胡三省又著手作《通鑒釋文辨誤》. 正在這時, 寧海楊鎭龍在二十五都起義, 攻下慶元, 威震浙東. 當時胡三省尙寓居在袁桷家, 爲了避亂, 只好把剛完成而尙未付印的《資治通鑒音注》及其他著作, 藏於袁家東軒的石窟中. 起義平息後, 全部著作仍完整無缺, 後遂流傳於世. 此石窟, 後人稱爲“胡梅磵藏書窟”, 地在今寧波市內大沙泥街袁家.  


元朝가 中國을 통일한 뒤, 政權日益鞏固, 隨卽對漢族士人采取拉攏的懷柔政策. 並派侍禦史程文海訪求江南文幹, 羅致去元朝爲官. 有些士人易節歸順, 如葉李․趙孟煩;有的拒不應召, 如三省同榜進士謝枋得. 這種形勢, 對注重民族氣節的胡三省又是一種威脅. 爲了減少意外麻煩, 在鄞寄寓日久並有蔔居之心的胡三省, 又毅然擧家歸中胡村定居, 並從此屛謝人事, 又著書爲樂. 自號“知安老人”, 堂上立匾, 題名《逸老堂》, 在居所南築讀書室, 名“讀書林”. 雖風燭殘年, 仍仍孜孜不倦地從事《資治通鑒音注》的修改工作, 嚴寒酷暑不停. 子女以其年高相勸阻, 三省說:“吾成此書, 死而無憾.” 大德 6년(1302)에 去世하니 享年 73歲였다.  


저작으로는 《資治通鑒音注》 외에도 일찍이 《통감변오(通鑒辨誤)》 12권과 《통감소학(通鑒小學)》 2권, 《죽소원고(竹素園稿)》 100권이 있으나 후자 2편은 이미 실전되었다. 三省은 일찍이 《통감지리고通鑒地理考》 100권 편찬에 착수해 원고를 완성했으나 왕심녕(王深寧) 저술과 대략 동일하다는 평가를 받자 원고를 태워버리기도 했다.  


胡三省所撰《通鑒音注》的體例演變, 大體分爲兩個過程:先是按唐陸德明《經典釋文》的體例, 寫成《廣注》․《通論》․《辨誤》三書;稿軼重撰時, 總成爲《資治通鑒音注》. 此書對《通鑒》記載的有關典章制度․音韻訓詁都有詳細注釋, 特別是對音訓․地理諸項, 考證尤爲精詳, 訂謬殊多. 古代對於《通鑒》的注釋, 卷帙浩繁, 曆來以此書聲價最高, 是目前硏究《通鑒學》最完整的參考資料.    


호삼성 유적(胡三省遺跡) 

胡三省, 生於南宋理宗 紹定 3年(1230), 卒於元 成宗 大德 6年(1303), 享年 73歲. 胡氏離開今天, 已達七百六十多年. 中間曆經滄桑之變, 關於他的遺跡, 還有哪些呢? 於此作一簡略綜述. 


首先是他的《資治通鑒音注》294卷, 分散於《資治通鑒》本文之中, 洋洋巨帙, 是一部與《資治通鑒》並列而存於世的不朽之作. 이 외에도 그의 《通鑒釋文辯誤》 12권은 刊於《通鑒》全書之後, 可謂集無數篇簡短駁論, 駁勘史(火召)等注史之謬, 亦是一部重要文獻. 그의 《新注資治通鑒序》는 《資治通鑒》 書目 앞에 붙어 있으며, 《通鑒釋文辯誤後序》는 《資治通鑒》 全書 끝에 붙어 있다. 這兩篇序文, 則是胡氏留下唯一獨立成文的完整文章. 這些均爲史學上的珍貴典籍, 一直來發揮其光彩奪目的作用. 筆者認爲這些遺著, 亦可看作是胡氏注史生涯的遺跡. 


其次, 自宋․元直至民國, 在這段曆史長河中, 人們對胡三省曾寫過不少文章, 如胡氏家族曆次修撰的宗譜, 胡氏的墓碑文記, 以及對胡氏的悼念文章和詩篇, 省․府․縣志書中的傳記, 辭典中的條目, 明․淸乃至民國學者對胡三省硏究的書籍, 從各個方面, 各種角度反映胡氏的思想, 人格和文章得失, 以及發抒緬懷悼念的感情等等, 都爲紀念和硏究胡氏的極好材料, 這些文字, 從廣義上說, 亦可作爲胡氏的遺跡對待, 唯數量特多, 散之於外, 甚難集收耳. 


第三, 胡三省之遺物. 至今在胡氏後裔中未見有何發現, 唯一所存者, 僅胡氏在袁氏塾(淸容齋)中所寫之《跋宋高宗書徽宗文集序》手跡墨寶一幀, 乃爲珍品, 現仍珍藏於寧海縣文物保管委員會中. 


第四, 胡三省的民間傳說. 這, 應與文字流傳同等看待, 時至今日, 仍有若幹傳說, 流述不衰, 乃爲對胡三省之口碑, 亦甚可貴. 故亦應列入遺跡之內. 


第五, 胡三省居住地中胡村中可考的遺跡, 筆者曾作過粗略采訪, 玆將所見所聞, 分述如下:


 (一)胡三省墓. 坐落於梅澗溪邊山脚. 後人已曾重修, 石質墳面, 正面文曰:“宋朝奉郞胡公三省偕配張氏安人壽域”. 墳面兩旁伸出石板側面鐫有“靑山不爲折腰辱;長使寒梅伴澗芳”對聯, 墳面之上石制墓飾(俗稱攔土者)兩旁亦有文曰:“司馬功臣;愛國史家”. 墓前有平壇, 因受地形限制, 未作擴展. 


 (二)三省公墓碑. 原墓碑已失. 碑文爲胡三省之四子胡幼文所撰. 由樟樹村人, 胡氏同鄕, 南宋理宗景定三年(1262)進士孫鈞所書. 現有重鐫墓碑, 高一米半, 寬約七八十厘米. 立於墓前平壇左側, 由現寧海書法家樓明月按原撰文字重書, 於一九九O年鐫立. 

 (三)梅澗溪. 原溪寬約二米餘, 在村東南, 旁村而流, 因近期來, 中胡村人口增多, 紛紛新建房宅, 地基緊張, 乃將該溪向外移出若幹米, 水流改道, 原溪基地填高, 成爲路面. 改道後之梅澗溪, 其名如舊. 


 (四)梅澗橋. 本架在原梅澗溪上, 村民可過橋上山. 橋爲石砌單拱, 溪澗不寬, 故橋身亦短. 橋面拱起, 橋頂橫鋪石板兩塊, 兩面各傾斜直鋪石板三塊. 梅澗溪改道後, 已無橋, 但村人爲紀念胡氏, 在原橋所在處之新宅旁, 立有石碑一方, 鐫有文曰“梅澗橋舊址”. 


 (五)梅澗井. 在改溪後之溪旁山脚. 此井未受改溪影響, 故井基未動, 其水淸澈, 水面雖旱不淺. 從胡三省在生時一直來, 村人飮用之水, 均由此井供給. 現在新澗上鋪有石板可通, 井口前亦裝修平展. 近年村中已建起自來水, 惟講究飮茶者, 或有釀酒者, 以該井水質佳美, 仍來此井中汲取. 


 (六)胡三省住居地. 因離今時日已遠, 很難斷定在何處. 村人推測, 卻有兩說, 一說爲現在村中之“後堂”, 另一說爲現在村中之“下車門”, 但以持前說者爲眾. 胡三省愛梅, 號梅澗. 現後堂住戶之屋前, 仍植有梅樹. 


 (七)馬園. 爲胡三省在官時, 供作養馬之所. 馬, 在當時爲重要交通工具, 乃作爲胡氏本人以及其侍從等乘騎之用. 據村人想像, 這塊土地之範圍, 似覺寬敞. 有人以爲胡三省晩年隱居時築“讀書林”, 與諸孫徜徉其間, 基地就在馬園之內, 蓋因其時已毋需養馬也. 


 (八)荷花池. 其地在原梅澗溪靠村一邊, 與三省公墓隔澗相對, 長方形, 面積約半畝, 當爲胡氏爲官與隱居時賞花觀魚之樂地. 此池據當地現今年近七十之老人言, 他們少年時, 尙見到其頹敗遺跡. 目前基地尙在, 筆者見有稻株斑斑, 想已成水稻田矣. 


 (九)胡三省之父鑰公之墓. 在村西近山之上, 胡竹鑫老人曾領我等上山觀察, 因無石板墳面, 爲亂石所砌, 全沒於柴草叢中, 看不出墳墓景象, 似應加以修葺, 方可供村中後裔及遊人憑吊.  


 (十)胡氏祠堂. 원래 사당은 1947년에 拆毁되었다가 重建되었다. 원래 胡氏祠堂에는 大型의 “梅澗遺風” 匾額이 있었다. 兩 旁柱 위에는 對聯 3구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는 “七歲文詞通裏巷;二旬榜第達朝廷”라 하고, 두 번째는 “蘭亭創業源流遠;梅澗遺風世澤長”라 했으며, 세 번째는 “宋代名宦芳留靑史;梅澗逸老澤典雲深”라고 했다. 新祠를 중건할 때 원래 있던 匾․聯은 모두 망실되고 지금 新祠堂 역시 敬老院으로 바뀌었다. 


此外, 寧海大佳何鄕虎鼻頭胡家村人胡福相, 於民國時期, 任台灣省行政長官兼警務處長時, 曾到中胡村聯宗祭祖, 爲仰慕胡三省之德行與學識, 乃於胡家村祠堂掛上“三省堂”匾額, 則亦應視爲胡三省村外之遺跡. 


第六, 三省小學. 1993~94년 寧海縣敎育委員會와 中胡村이 연합 출자한 小學이 있으니 이곳에는 三層主樓一幢이 있고 곁에는 附屬輔屋一座가 있다. 현대의 신식 건물이다. 1994년 낙성되었다. 爲了紀念和緬懷當地愛國史學家胡三省, 命名爲三省小學. 筆者於回顧胡氏遺跡之時知之, 不勝欣喜! 蓋胡三省之愛國精神, 道德情操, 治學態度, 將綿綿於中胡, 源遠而流長焉. 


以上所述者, 有的今尙存在, 有的需加修葺, 有的則已湮沒, 有的卻有擴建, 今特記之, 以供後來者之懷念雲耳.  


胡三省

胡三省(1230~1302), 中國宋元之際史學家. 字는 身之. 臺州 寧海(지금의 浙江 寧海)人. 南宋 理宗 寶佑 연간에 進士가 되었으며 縣令․府學敎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賈似道의 부름에 응하여 從軍하여 蕪湖에 갔으며, 누차 간했으나 賈似道가 專橫하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후에 은거하고는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寶佑 4年(1256)에 《資治通鑒廣注》 저술에 착수하여 97卷, 論 10篇으로 완성했다. 臨安(지금의 浙江 杭州)이 失陷된 뒤, 手稿는 新昌(지금의 廣東 臺山)에서 유망하는 도중에 散失되었다. 宋이 亡한 뒤, 重新撰寫했다. 元 世祖 至元 22年(1285)에는 《資治通鑒音注》294卷과 《釋文辯誤》 12卷을 완성했으니 이들은 對《通鑒》에 대해 校勘․考證․解釋을 가하거나 《釋文》의 辯誤를 논한 사학 평론서라고 할 수 있다. 注文中多處聯系蒙古滅宋事實, 發表感慨, 寄托民族感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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