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성장사는 곧 무력 정벌항쟁의 역사였음을 엿본다. 특히 초기 신라사를 볼 적에 주변 소국 정벌이 매우 활발했다. 신라가 초기 역사에서 자국 영토로 편입한 주변 소국으로는 다음이 보인다. 아래는 추후 보강할 대목이 적지 않다.
① 우시산국(于尸山國)·거칠산국(居柒山國) : 탈해니사금(57∼79 AD)
거도(居道)는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때(재위 57∼79 AD)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이웃 지경에 개재(介在)하여 자못 나라의 근심이 되었는데…이에 병마를 출동해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했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道)
台植案 : 둘 다 山이라는 표기가 들어가 있어, 그러한 산을 낀 지역에 자리잡은 소국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거칠산(居柒山)은 진흥왕 시대를 주름잡은 정치인 중 거칠부가 있으니, 일명 그를 황종(荒宗)이라 한다 했으니, 이를 감안하면 말 그대로 거친 산이라는 뜻일 터인데, 그래서 지금의 부산 남구 일대에 정좌한 황령산(荒嶺山)을 그 본거지로 지목하는 일이 많다. 황령은 글자 그대로 읽으면 거친 산이 된다.
② 음즙벌국(音汁伐國)·실직국(悉直國)·압독국(押督國) : 파사니사금 23년(102 AD)
○ 군대를 일으켜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치니 그 임금이 무리와 더불어 스스로 항복하고, 실직(悉直)·압독(押督)의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했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3년<102 AD>).
○ 실직(悉直)이 叛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쳐서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를 남도(南鄙·도읍 남쪽 바깥)로 옮겼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5년<104 AD>).
○ 장산군(獐山郡)은 지미왕(祗味王. 재위 112~134) 때 압량소국(押梁小國-梁은 '督'으로도 쓴다)을 쳐서 취하여 郡을 두었다.(《三國史記》권 34, 志 3, 地理 1, 獐山郡). : 獐山郡, 祗味王時, 伐取押梁(一作督)小國, 置郡, 景德王改名, 今章山郡.
○ 압독(押督)이 叛하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쳐서 평정하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남쪽으로 옮겼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일성니사금 13년<146>).
台植案 : 압량소국(押梁小國)은 말할 것도 없이 이름이 압량인 작은 나라라는 뜻이니, 압량소국 자체가 고유명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지미(祗味)는 6대 지마니사금(祗摩尼師今)을 지칭한다.
재위기간은 112~134년. 압량국, 곧 일명 압독국은 실직국과 더불어 파사왕 때 음즙벌국이 망하자, 자발로 신라에 귀부했지만, 이내 신라를 배반했다. 신라군과 맞선 음즙벌국을 음으로, 혹은 양으로 도왔을 것이다.
음즙벌국을 치니 실직과 압독 두 나라가 항복했다 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직전까지는 실직과 압독 두 나라는 음즙벌국에 대해 부용국, 혹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부용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음즙벌국에서 자제를 분봉했거나, 혹은 그 건국 과정에서 그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음즙벌국이 신라가 초기에 상대한 이웃 정치체 중에서는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실직을 힘으로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금성 남쪽으로 이주시켰듯이, 압독에 대해서도 같은 정책을 취했다고 하니, 이 남쪽이 신라 왕도 기준으로는 신도시 혹은 저개발 지역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는 본다. 신라 고고학은 이 점을 유념했으면 싶다. 아무튼 신라에 합병된 실직국과 압독국 사람들은 신라에 결코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내 반란을 일으킨 까닭이다. 두 가지 가능성 정도를 상정한다. 첫째, 그 자발적 항복 자체를 반대한 흐름이 있었고, 그런 흐름 일부가 나중에 결국 독립운동으로 발전했을 수 있다. 그에 더불어, 정벌지역에 대한 신라의 통치가 매우 폭압적이었을 가능성도 내치지 못한다. 착취가 심했을 수 있다. 그래서 압독은 자발적 귀부 불과 2년만에 독립투쟁에 나서며, 압독은 7대 일성니사금(재위 134∼154) 때, 반신라 기치를 표방한 반란을 일으킨다. 지역색은 여전히 강고했던 것이다. 이는 거꾸로, 신라의 지배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엿보는 한 줄기 빛일 수도 있다. 무리하게 군사적 징벌을 통한 강제합병은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한 까닭이다. 부용국으로 놔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③ 비지국 혹은 비기국(比只國)·다벌국(多伐國)·초팔국(草八國)
○ 군사를 보내 비지국(比只國)과 다벌국(多伐國)과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합쳤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9년<108>).
台植案 : 추후 보강
④ 소문국 혹은 조문국(召文國) : 벌휴니사금 2년(185)
○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仇須兮)를 발탁해 각각 좌우(左·右) 군주(軍主)를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치니, 군주(軍主)라는 이름은 이에서 비롯됐다.(《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벌휴니사금 2년<185>).
台植案 : 召文은 역대로 그 발음이 두통이다. 그 본거지인 의성 현지에서는 요즘 들어 조문으로 통일했다. 그 까닭은 '소문'이 여성 음부와 발음이 같아 꺼린 까닭이다. 이를 경덕왕이 나중에 '문소(問韶)'라고 소위 한식(漢式) 개명한 점을 고려하면 신라시대 발음은 조문보다는 '소문'에 가까웠을 듯하다. 아무튼 조문국이건 소문국이건, 이 나라는 신라사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정벌 당시 구도가 취한 소문국 왕녀가 바로 이후 신라 왕실 역대로 줄곧 왕비를 공급한 진골정통 뿌리가 되는 까닭이다.
⑤ 감문국(甘文國) : 조분니사금 2년(231)
○ 이찬(伊飡) 우로(于老)로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쳐서 깨뜨리고는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조분니사금 2년<231>)
台植案 : 감문은 현재도 경북 김천시(이전에는 금릉군)를 구성하는 하위 행정단위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긴다. 더불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필두로 하는 역대 지리서를 봐도, 이 김천 지방이 그들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문을 정벌함으로써 신라는 이 무렵 추풍령을 필두로 하는 소백산맥 교통로를 확보한다. 이는 한강 유역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관통하는 북부 교통로를 더 일찍 뚫은 사실과 비교할 때 무척이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⑥ 골벌국(骨伐國) : 조분니사금 7년(236)
○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저택(邸宅)과 전장(田莊)을 주어 편히 살게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조분니사금 7년<236>)
台植案 : 신라가 초창기에 합병한 인근 국가 중에서 그 국왕 이름이 보이는 유일한 사례다. 나아가 골벌국은 훗날 금관가야가 그랬듯이, 그리고 신라가 고려에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갖다 바친 형식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시대 군사력을 강제 발동해 합병한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그런 까닭에 그 귀부한 마지막 왕 이름을 특기特記했을 것이며, 나아가 그런 까닭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는 그에게 저택과 전장을 내린 것이다.
⑦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량벌국(沙梁伐國)
: 첨해니사금(沾解尼師今) 代(247∼261)
○ 상주(尙州)는 첨해왕(沾解王) 때 사벌국(沙伐國)을 취하여 주(州)를 삼았다.(《三國史記》권 34, 地理志 1, 상주)
○ 첨해왕(沾解)王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이미 우리에게 복속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반하여 백제에 귀복(歸服)하므로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멸(討滅)했다.(《三國史記》권 45, 列傳 5, 于老)
台植案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일대를 점거한 신라시대 초기 정치체는 사벌국 혹은 사량벌국이라 일컬었으니, 사벌국은 사량벌국에 대한 줄임인 듯하다. 사량(沙梁)의 '梁'은 압독(押督)을 일명 압량(押梁)이라 했듯이, 그리고 기타 몇 가지 사례에서도 梁은 督과 호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 발음은 '돌' 혹은 그에 가까우니, 당시 발음 혹은 새김은 '돍'으로 재구가 가능하다. '돍'을 발음하는 방법은 '닭'과 같다. '닭'을 현대 서울 사람들은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나, 지금의 경상도 사람들은 받침 ㄹ과 ㄱ 둘 다 한꺼번에 한다. 이렇게 되면, '돍'과 현대어 '닭[鷄]'이 발음에서 매우 흡사하게 된다.
⑧ 이서고국(伊西古國) : 유례니사금 14년(297)
○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하므로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물리치지 못했다. (《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유례니사금 14년<297>)
台植案 : '伊西古國'이 이서국이라는 옛날 나라를 지칭하기 위한 표기인지, 혹은 '이서고'가 현재는 알 수 없는 어떤 의미 덩어리를 지닌 고유명사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본다. 그것은 신라가 초창기에 점령 합병한 다른 국들에 대해서는 저런 식으로 무슨 古國이라 붙인 경우가 없는데, 유독 이서국에만 그리했다고는 보기 힘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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