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그림을 보자.
인도문명의 기원전 2500-2000년 즈음에 인더스 문명이 있다.
이 인더스 문명이 사라지고 또 다른 문명이 인도아대륙에 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Vedic India"이다.
이렇게 이름 붙은 이유는 이 시대가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오래된 성전인 "베다 (Vedas)"와 관련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베다시대 (기원전 1500-기원전 500)야말로 이후 힌두교와 산스크리트 문학이 처음 형성되고 번영하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인도문화"가 바로 베다시대 문화와 매우 관련이 깊다고 한다.
인도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더스문명"과 "베다시대" 사이에 중대한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대한 단절"이란 "기억의 단절"을 의미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극히 최근까지 심지어는 20세기 초반까지도 인도인들이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역사는 "베다시대"이고 "인더스 문명"은 그 족보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인들은 이 "베다시대"를 까마득한 옛날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인더스 문명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 인도사가 짧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더스 문명을 그 자리에서 지우고 그 기간을 베다시대로 길게 늘려 채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겠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이 처음 인도에 진출했을때 역사학자들은 인도사가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래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전에 베다 시대를 고려한다 해도 그리스 문명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것보다도 짧은 문명일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인데-.
이러한 서양인의 인식이 일거에 바뀐 사건이 1924년에 일어났다.
고고학자 John Marshall이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인도아대륙에서 "잊혀진 고대문명"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마샬이 숨가쁘게 날린 멘트는 다음과 같다.
"Not often has it been given to archaeologists , as it was given to Schliemann at Tiryns and Mycenae, or to Stein in the deserts of Turkestan, to light upon the remains of a long forgotten civilization. It looks, however, at this moment, as if we were on the threshold of such a discovery in the plains of the Indus."
바로 이 시점부터 고대문명으로서 "인더스 문명"이 세계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아는 인더스문명의 연구사는 이제 100년이 간신히 넘은 셈이다 (사실 인더스 문명 유적지가 최초로 사람들에게 인지되기는 이보다 훨씬 전인 19세기 초반이다. 하지만 이 유적이 시간이 매우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문명으로 인식되기는 마샬의 이 보고가 처음이다).
이처럼 인더스 문명에 대한 인도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하지만 곤혹스러운 부분도 있다. 왜 그런가?
바로 위에도 썼지만 인더스 문명 자체에 대한 기억이 인도사에서 통채로 지워졌기 때문이다. 인도의 고대사회를 묘사한 기록 이른바 베다 문헌 (Vedic text)에는 인더스 문명 사회와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묘사가 별로 없다.
인더스 문명 이후에 이어지는 "베다 시대" 사회와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는데 인더스 문명시기까지 베다 문헌에 묘사된 이야기를 소급하여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마하바라타 중 바그바드 기타의 내용이 되는 전투 장면. Vedic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베다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말과 전차=chariot"다.
인도의 유명한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크리슈나"가 말이 끄는 전차를 몰며 "아르주나"를 돕는 장면이 나온다. 위키피디아에 기술된 내용을 간추려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마하바라타》의 주제가 되고 있는 바라타족의 전쟁은 쿠루국(國)의 100인의 왕자와 판두왕의 다섯 왕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종형제였지만 형세의 진전에 다라 마침내 전쟁에 사투(死鬪)를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대회전(大會戰)이 전개되려고 하는 때에 판두의 한 왕자인 아르주나는 골육상쟁의 전율할 운명을 비탄(悲嘆)하며 자기 수레 몰이꾼인 크리슈나(실은 최고신 비슈누의 화신)를 향하여 고뇌를 호소한다. 아르주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크리슈나는 두려워 하는 아르주나를 격려하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즉시 전장에 돌입하기를 주장한다. 그가 이르기를,
“이 전쟁은 정의(正義)의 싸움이다. 정의의 싸움에 투신하는 것은 무사가 본래 바라는 바이다. 전투를 피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의 본무(本務)를 실행한다는 것이 주요문제이지, 일의 성패는 문제삼지 않는다. 당신이 전심(專心)해야 할 점은 오직 행동이지 결코 결과가 아니다. 행동의 결과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 (중략)....
이러한 교훈을 듣고서 아르주나 왕자는 "나의 각오는 결정되었다. 의혹은 이미 사라졌다"라고 말하면서, 마음의 불안을 버리고 흔연히 전장에 진출하여 위대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아르주나 왕자의 마차를 몰던 사람이 바로 크리슈나의 아바타다. 신인 크리슈나가 사람의 몸으로 말이 끄는 마차를 몰며 아르주나 왕자를 돕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도고고학은 인더스문명 유적에서 전차와 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베다시대의 중요한 상징인 말과 전차가 인더스 문명에서도 나온다면 인도역사의 기억을 인더스문명까지 끌어올릴 수 있음과 동시에 인더스 문명과 베다시대의 문화적 연속성도 쉽게 증명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더스 문명에서는 베다시대의 상징이라 할 말과 전차가 지금까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더스 문명 유적에서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전차 흔적은 나온 적이 있는데
말뼈는 지금까지 나온적이 없다.
말뼈가 나오지 않는 한 말은 아리안족과 함께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왔다는 주장이아직도 힘을 얻고 있는 터이다.
우리에게 기마민족설이 민족주의적 사관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던 것처럼
인도인에게 있어 말과 마차는 그 또한 민족주의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최근 마차가 발견되어 인도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자세한 기사는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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