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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마침내 찾은 능산리고분군의 동東고분군

by taeshik.kim 2022.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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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 동쪽서 봉분 지름 20m 백제고분 추가 발견
박상현 / 2022-05-03 10:23:19
전통문화대 발굴…일제강점기 알려진 고분도 재조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둔 사비기(538∼660) 왕릉급 무덤떼인 충남 부여 왕릉원 동쪽에서 백제 고분 1기가 추가로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는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 발굴조사'를 통해 사비기 전형적인 무덤인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을 새롭게 찾아냈다고 3일 밝혔다.

부여 왕릉원 동쪽서 봉분 지름 20m 백제고분 추가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둔 사비기(538∼660) 왕릉급 무덤떼인 충남 부여 왕릉원 동쪽에서 백제 고분 1기가 추가로 발견됐다.문화재청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

k-odyssey.com



해직기간에 돌입한 직후 엣날에 쓴 원고를 도로 꺼집어 내어 그 해직 첫해에 《직설 무령왕릉》을 탈고한 직후 나는 부여군 의뢰로 느닷없이 부여 능산리 발굴기 집필을 의뢰받았으니, 백수가 제일로 약한 데가 돈이라, 용돈 벌어볼 요량으로 그에 손을 댔으니, 그리하여 해직기간 두 번째로 나온 단행본이 《부여 능산리 고분·사지, 지난 100년의 일기》였다.

부여군이 지원하고, 그 산하 백제고도문화재단 사비도성연구단이 진행한 학술지원 사업인 까닭에 저는 《부여 능산리고분군 조사기록화사업》 전 5권 중 한 권으로 포함됐으니, 아마 그 원문은 pdf 형태로 부여군에서 지금도 제공 중일 것으로 알거니와, 그때 대상으로 삼은 데가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절터였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본 능산리 고분군이다. 중앙지점 중앙고분군이라 표시된 곳이 우리가 능산리고분군이라면 떠올리는 그 무덤떼다. 사진 중심으로 왼편에 서고분군이 있고, 그 서고분군 다시 왼편 대지가 능산리 절터이며, 그 절터 왼편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담장 같은 시설이 부여나성이다. 중앙고분군 오른편으로 조사지점이라 표시된 곳이 바로 동고분군이 확인된 지점이다.


이중에서도 요새는 부여 왕릉원이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 명칭을 바꾼 능산리 고분군은 나로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으니, 이 무덤떼는 우리가 지금도 능산리 고분군이라는 떠올리는 아래위 두 줄 세 봉분씩 세트를 이룬 6기 우람한 봉분을 말하지만, 실상은 전연 달라 이 중앙무덤군에도 7호분이라 이름하는 다른 무덤이 있어 얼마전 타계한 강인구 선생이 70년대에 조사했으며

그에 더불어 이 중앙고분군을 중심으로 능산리 절터와의 딱 중간에 끼는 야산 둔덕에는 능산리 서西고분군이라 해서 따로 무덤떼가 있었고, 그 반대편, 그러니깐 중앙고분군을 중심으로 동쪽에도 한 무리 무덤이 있어 이를 능산리 동東고분군이라 했다.

문제는 저들 동서 고분군은 식민지시대에 조사가 되었지만, 그 조사기록이 빈약하기 짝이 없고, 또 무엇보다 그 이후 그 정확한 위치조차 상실하는 바람에 대강 어드메쯤 있는 줄은 알지만 그 정확한 위치와 무덤 양상은 그 간단한 식민지시대 조사 자료 말고는 남은 자료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 접어들어 사정이 일변하기 시작했으니, 무엇보다 이를 포함한 백제유산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2015년에 등재하면서 그를 즈음해 재조사에 착수했으니, 그 직후 무엇보다 서고분군에 대한 확인에 착수해 그 양상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능산리 서고분군은 4기가 알려졌다고 기억하거니와, 전통문화대학교에 의뢰한 발굴조사 결과 그 네 곳이 모두 드러났다.

문제는 그때 5개 무덤을 확인했다는 동고분군이었다. 이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을 뿐더러, 그 조사상황 기록은 더욱 빈약하기 짝이 없어, 나 역시 졸저를 준비하면서 그 어드메쯤이라고만 퉁치고 말았다.

그 동고분군을 이번에 확인했단다.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이 주동이 되고, 부여군에서 그 조사를 이번에도 전통학교에 의뢰한 결과 서현주가 이끄는 조사단이 마침내 동고분군 흔적을 찾아냈으니, 물론 식민지시대에 보고된 동고분군 5개 중에서 1호분이라고 이름한 그곳과 기타 기존에 알려지지 아니한 무덤 한 곳을 더 찾아내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동고분군 제1호분


식민지시대에 조사되고서 그네들이 1호분이라고 명명한 데를 다시 찾아냈다. 보다시피 전형적인 백제 돌방무덤이라, 그 전면에는 기다란 passwa가 있다. 그 중앙지점을 따라 난 데는 보나마나 배수로라, 무덤으로 스며드는 물을 빼내기 위한 시설이다.

한데 저 사진을 보면 무덤길 왼편 둔덕에 뭐 이상한 무덤 시설 하나가 더 있음을 보게 된다. 저를 이번에 새로 발견했으니 이를 6호분이라고 이름 붙인 모양이 아닌가 하는데, 현장을 보지 못해 내가 자신은 없다. 격벽처럼 중앙에서 확인되는 데 흙무더기를 남긴 거라 한다.

조사 결과 동고분군 1호분 역시 원형이 봉분에다가 그 아래 지하에다가 시체를 묻는 시설인 매장주체부를 둔 굴식돌방무덤, 이른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드러났다.

무덤길에서 쳐다본 1호분 무덤방 입구와 내부. 캬! 딱 각 잡았네. 저 무덤방 입구에는 보통 네모난 돌을 대어 대문으로 삼았다. 대문은 끄집어 냈거나 아니면 누가 재사용한다고 가져갔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명명한 6호분은 동쪽 능선 남쪽 경사지대에 위치하며, 그것을 만들 당시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한 것으로 조사단은 평가한다. 이 무덤은 봉분 기준 지름 20m 정도가 되며, 그 봉분 외부로는 호석護石이라 해서 돌담장을 돌렸음이 확인되며, 아래쪽 경사진 곳에다가 2단 축대를 설치하고는 묘역을 조성했단다.

이건 뭐 지금도 구릉지대에 집을 지을 적에 하는 수법과 똑같다. 높은 데는 깎아내고 낮은 데는 축대를 쌓아 편평하게 만들려면 저리밖에 더 하겠는가? 요상하게 여길 필요 단 하나도 없다.

이번 조사에서 무덤길이 두 차례에 걸쳐 만든 흔적이 확인됐다는데 이를 조사단은 추가장이 실시된 흔적으로 본다. 하긴 저런 무덤은 대문만 따고 다시 열고는 시체를 추가로 집어던지면 되니깐 말이다.

이 두 차례 흔적이 뚜렷이 확인됐다는데 글쎄 나는 고고학도들이 추가장 흔적이라 하면서 저런 설명을 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자주 본 적이 있는데 썩 신뢰는 안 가더라!!!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 6호분


추가장은 보통 부부 사이에 행해진다. 마누라 남편이 동시에 죽는 행운은 실상 매우 드물어 죽는 시기를 달리하기 마련인데, 보통은 남자가 먼저 죽고 여자는 한참을 더 살며 룰루랄라하다가 죽는다. 반대인 경우도 드물지는 않지만 보통 이렇게 시기를 달리해서 죽는 부부를 위해 저와 같은 합장무덤을 맹근다.

글쎄다 살아서도 웬수 같았는데 죽어서도 같이 묻힌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법하다. 각자도생!!! 졸혼도 시원찮은 판에 무슨 합장이란 말인가? 각자 살다 각자 가자!!!

이상은 내가 현장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아직 현장설명회 자료가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그 조사 책임자 서현주 선생한테 궁금한 점들을 물어 정리한 것이므로, 그 점을 혜랑하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저에 대한 우리 공장 보도는 앞에 첨부한 기사를 참고토록 하고, 그 토대가 된 보도자료를 첨부한다.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에서 백제 왕릉급 고분 추가 확인
- 추가 매장이 확인된 백제 왕릉급 고분 발견 / 현장공개 5.4. 오후 2시 -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부여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 발굴조사’에서 백제 고분의 축조 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고분 2기가 확인되어 오는 4일 오후 2시 발굴현장을 공개한다.

* 발굴현장: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번지/조사기관: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

6호분이라고. 호석이 뚜렷하다.



부여 왕릉원은 일제강점기에 3차례(1915년, 1917년, 1938년)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조사구역인 동고분군에서도 5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번 조사에서는 새로운 고분 1기(6호분)를 추가로 발견하였고, 일제강점기에 확인되었던 고분 1기(1호분)의 실체를 재확인하였다.

조사된 고분은 모두 원형의 봉분과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이다. 새롭게 발견된 6호분은 동쪽 능선 남사면에 입지하며, 고분 축조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 사비기 왕릉급 고분의 조성과정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봉분은 지름 20m 정도로, 외부에는 경계석렬(호석, 護石)이 확인되었고, 고분 외곽의 사면부 하단에는 2단의 축대도 설치하여 묘역을 조성하였다. 또한, 돌방무덤 앞의 무덤길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성되어 추가 매장의 흔적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봉분 내 추가 매장 흔적은 부여 왕릉원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왕릉급 고분의 매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 굴식돌방무덤: 무덤 옆으로 통로를 내어 돌방으로 내부를 만든 구조
* 호석: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무덤 아랫부분을 둘러막은 돌
* 무덤길: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신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

6호분 무덤방 입구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바 있는 1호분은 재조사를 통해 고분의 위치와 규모를 명확히 확인하였는데, 고분 조성 전에 땅을 반반하게 고른 후 쌓아올린 봉분과 돌방무덤 앞에 매장을 위해 길게 조성된 무덤길(묘도, 墓道)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4일 발굴현장 공개 후에도 국민과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조사기간 중 상시로 현장을 개방하여 백제문화에 대한 국민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높여 나갈 계획이다.
* 조사기간: 2022. 5. 13(금)까지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과 부여군은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의 정비와 관리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며, 세계유산이자 백제왕도 핵심유적인 부여 왕릉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지원하여 백제 사비기 장례문화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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